조선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를 책으로 만나다
‘낮에는 백 리를 걷고, 밤에는 고해를 듣는’ 고된 일정으로, 조선의 교우촌을 방문하며 7천 리 이상을 순방했던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그가 평생 걸었던 거리는 무려 9만 리가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그렇게 오래도록, 먼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사제의 성사를 바라는 조선 곳곳의 교우들을 위해서였다. 생명의 위협이 일상이었던 박해 시대, 최양업 신부가 그 멀고 험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목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양들’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양들이 있어 나는 걸었네』는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 귀국 후에는 동시대 유일의 조선인 사제로 12년간 조선 땅 곳곳을 다니면서 교우들을 방문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었던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책이다. 최양업 신부가 스승 선교사들에게 남긴 서한과 현대의 연구 자료 등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톺아보고, 현대의 연구 자료 등을 활용해 그 업적의 위대함을 알려 준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할 때까지, 이 모든 지역을 맡아 사목 순방 활동을 했다. 당시 조선 전체에서 새로 입교한 예비 신자와 영세자 중 3분의 1에서 많게는 절반 가까운 수가 최양업 신부가 관할했던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실로 놀라운 활동 범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최양업 신부를 알려 주는
쉽고 편한 정보와 도표 및 삽화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양들이 있어 나는 걸었네』는 주어진 자료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표와 삽화, 지도 등을 적절히 사용했다. 최양업 신부의 가계도와 연표는 물론, 근래의 연구 성과들이 반영된 유학로의 여러 가설을 표시한 지도, 최양업 신부의 입국로 탐색, 최양업 신부와 연관된 교우촌 분포를 표시한 지도 등은 관련 내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 책의 부록 격인 ‘더 알아보기’에서는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정보들을 제공한다. 선종지에 대한 여러 이견들과, 최양업 신부가 본 조선 사회에 관한 정보들은 기존의 독자들이 알고 있던 최양업 신부에 관한 정보를 더욱 심화시켜 줄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숨결을 찾아서’는 최양업 신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락골, 배티, 배론, 수리산 성지를 간략한 정보와 사진 등으로 소개한다.
‘배나무 고개梨峙’라는 뜻의 배티는 돌배나무가 많은 고개라서 붙은 이름이다. 배티 성지는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스며든 천주교 신자들이 일군 교우촌이자,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뼈대가 세워진 곳이다. …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부터 이곳에 머물며 5개 도에 흩어진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사목 순방을 끝낸 9-10월에는 이곳 사제관에서 여러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사제이자 통번역가, 교육자
우리가 몰랐던 최양업 신부의 업적
부제품을 받고 홍콩에 머물던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중, 기해박해 순교자 73인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았다. 이 자료는 교황청으로 전해졌고, 순교자 82위가 모두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최양업은 그 기쁨을 편지로 남기기까지 했다. 훗날, 가경자 82위 중 79위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와 함께 103위 순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에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천주가사’와 교리서를 지어 교리 교육의 토착화를 위해 힘썼다. 또한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신학교를 맡아서 관리하면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 신학생을 페낭의 신학교로 보내 신학 교육을 받게 했다. 최양업 신부는 그들이 조선 사회의 폐단인 신분제를 넘어 하느님 자비의 아들이 되어 교우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최양업 신부는 배티 신학교에서 페낭으로 유학을 떠났던 세 명의 조선 신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들에게 해마다 편지를 보내며, 고독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을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한편, 서울로 상경할 일이 있을 때면, 배론 신학교에 들러 국내에서 수학하는 신학생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며 신학생 양성에 힘을 보탰다.
- 3장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업적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한국 교회의 움직임
최양업 신부는 마카오 유학 시절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 사회에도 선진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그는 스승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식수의 수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열악했던 여성 교우들의 삶은 그의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 중의 하나였으며, 교리 교육을 위해 한글 활용을 제안하고 실천한 것은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다.
1996년 한국 천주교회가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해 노력해 온 이후, 현재 최양업 신부는 ‘가경자’의 위에 올라 있다. 시복과 시성을 위한 과정 중 기적 심사에서 문화적 차이에 의한 어려움으로 한 차례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최근 의학적 기적 심사의 첫 단계를 통과해 신학위원회와 추기경 및 주교 회의의 심의를 앞두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과 시성은 오늘날 전 세계에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최양업 신부의 성덕과 삶의 숭고함을 알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거자로서 모든 사제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그의 시복과 시성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기 때문이다. …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과 삶은 한국 교회뿐 아니라 아시아 교회 사제 영성의 귀감이자 장차 이루어질 선교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 4장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 추진 과정과 전망
책 속으로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부르심과 기쁨을 조선 곳곳에 다니시며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전하고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거센 시대의 풍파와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두려움에 흔들리던 교우들에게, 하느님께 의탁하며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 추천의 글, 6쪽
한국 천주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 그의 삶과 영성을 지속적으로 현양하며,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2016년 교황청은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였고, 2026년에는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의 첫 단계인 의학자문위원회의 승인이 이루어졌다. - 최양업 신부의 간추린 일생, 16쪽
박해의 한복판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던 최양업 신부의 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변치 않는 이정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신뢰의 씨앗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사랑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이 길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고요하고도 강렬한 영적 울림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여는 글, 25쪽
초대 조선 대목구장(교구장)으로 조선 땅에 들어오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끝내 중국에서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 그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에 입국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을 선발한 모방 신부, 마지막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목과 신학생 양성에 힘쓰다 모방 신부와 함께 순교한 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이야기이다. 이들이 초기 조선 교회와 최양업 신부에게 미친 영향을 이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한다. - 1장 부르심의 씨앗, 28쪽
최양업의 본관은 경주慶州, 보명譜名은 ‘구정九鼎’으로 ‘양업良業’은 관명冠名이다. 최양업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의 가족들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신앙을 위해 고향까지 떠났던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최양업이 유학을 떠난 뒤 일어난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최양업의 형제들 중, 막내 스테파노는 기해박해 시기에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고아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면서 맏형 최양업의 귀국을 학수고대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48-49쪽
최양업은 유년 시절 부친을 따라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전전하던 중, 1836년 초 경기도 부평의 산간 지대에서 생활하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최양업은 1836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인 12월 3일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세 신학생은 조선 교회의 밀사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유진길과 함께 중국 변문邊門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샤스탕 신부는 그길로 조선으로 입국했고, 세 신학생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하던 파발꾼들과 함께 마카오로 향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51쪽
1842년 이후 최양업 신학생은 상해와 요동 지방을 거쳐 길림성의 소팔가자 교우촌에 머물며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드디어 1844년 12월에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조선 입국 직전에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최양업 부제는 1849년에 가서야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이는 박해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62쪽
최양업 신부가 활동했던 1850년대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삶의 터전을 떠난 이들이 깊은 산중에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해, 그 수가 늘어 가던 시기였다. 교우촌에서는 교육의 기회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제한적이었기에 빈곤과 무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복음의 전파도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86쪽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한 해 동안 2,867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어른 171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관할 구역의 신자는 4,075명, 예비 신자는 108명이라고 알렸다. 또한 모든 순교자의 전반적인 역사를 편찬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에게는 그동안 모아 온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을 전달하기도 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109쪽
최양업 신부는 경신박해의 피해 상황과 교우촌 순방 결과를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졌다(5월 말 혹은 6월 초). 인근의 한 교우촌에서 사경을 헤매던 최양업 신부는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은 후, 1861년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선종했다. - 2장 최양업 신부의 생애, 117쪽
현대 한국 사회를 사는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할 기회가 거의 없기에, 최양업 신부의 ‘순교 영성’은 우리에게 매우 큰 시사점을 준다. 순교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데에 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라는 헌신과 선교의 삶은 순교자적 삶과 일치한다.
- 3장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업적, 131쪽
최양업 신부는 매년 전교 여행을 떠나 천주교 교리 내용을 담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보급해 신자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했고, 예비 신자들에게는 세례의 은총을 전해 주었다. 바오로 사도가 동족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가졌던 것처럼, 최양업 신부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이 자라도록 돌보았다. - 3장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업적, 135쪽
최양업 신부는 외적인 영화와 부귀, 공명을 우선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자란 신학생들이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그들이 참된 인간성을 갖추어,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을 배우고 올 수 있기를 바랐다. 신자들 중에서도 신분의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는 풍조가 있었기에,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들이 그리스도교의 신덕信德과 형제애를 키워 신분제가 일으킨 폐단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랐다. - 3장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업적, 159-160쪽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 추진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거자로서 모든 사제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그의 시복과 시성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기 때문이다. 아시아 선교의 주역이 되고자 다짐하는 한국 교회는, 최양업 신부를 닮은 사제들이 더욱 많이 배출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 4장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 추진 과정과 전망, 197쪽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우리 교회의 민족애, 나아가 인류애를 되찾고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든든한 영적 토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가 걸었던 기나긴 길은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길을 내는 과정이었다. 이제 그가 남긴 사랑의 불꽃이 우리 마음속에 옮겨 붙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희망의 길’을 만들어 가는 거룩한 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맺는 글, 203-2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