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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사의 근본, 『한국천주교회사』 개정판 간행


『한국천주교회사』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샤를르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과정과 순교사를 수록하여 1874년에 간행한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로서, 한국 교회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이 책의 서설은 지리·역사·왕실·언어·가족제도 등 15개 항목으로 한국 전반을 개관한 한국학 개론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서양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본론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서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여, 한국 교회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가독성과 깊이를 더한, 47년 만에 나온 개정판


1979년 『한국천주교회사』 역주본 초판이 간행된 이후로 47년 만에 발간된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에 한자와 한글이 병용되어 있던 부분을 한글로 바꾸어 가독성을 크게 높였다. 그리고 그동안 새롭게 밝혀진 교회사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주석을 대폭 보완함으로써 최근 교회사 연구의 경향을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권마다 색인을 수록하여 연구자와 독자들이 관심 있는 내용을 더욱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여 학술적 실용성을 높였다.


연구자들과 일반 독자 모두 편하게 볼 수 있는 책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간행사를 통해 “최근 성지순례의 붐과 함께 일어나고 있는 한국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이 책으로 더 확대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밝혔다.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나온 『한국천주교회사』 개정판은 천주교회사와 한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잡고, 교회사가 다소 생소한 일반 독자들에게도 한국 천주교회사를 좀 더 가까이서 접하는 한편 이 책의 가치를 더 널리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


책 속으로


오송만(吳淞灣)에 (김대건) 안드레아의 배가 나타난 것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 배의 이상한 생김새와 거기 타고 있는 사람들의 낯선 의복은 대중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하여, (김대건) 안드레아가 거기 정박해 있는 영국 배들 가운데에 닻을 내리는 기지가 없었더라면 큰 위험을 당했을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가 “나는 조선 사람인데 당신들의 보호를 청합니다.” 하고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장교들은 몹시 놀랐다. 이 보호가 관대하게 베풀어졌다. 영사는 그를 가마에 태워 어떤 신자 집으로 보냈는데, 여기서 (김대건) 안드레아는 급히 고틀랑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선교사는 동료 중 한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김대건 신부의 활동’ 중에서, 97쪽)


군사들은 모래에 창(槍)을 하나 박았는데 그 꼭대기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고 군사들은 그 둘레로 죽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원(圓)의 한쪽을 터서 그 안으로 죄수를 받아들였다. 관장은 그에게 선고문을 읽어 주었다. 선고문은 그가 외국인과 교섭을 가졌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내린다고 적혀 있었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크게 소리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중에서, 153쪽)


조선으로 떠나기에 앞서 베르뇌 주교는 부주교를 선택하여 성성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그 권한을 더 오래 유보한 채로 있기를 원치 않았다. 항상 안정되지 못한 교회의 상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하여 극복해야 했던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오래지 않아 새로운 박해가 일어나 최고의 목자를 침으로써 조선에 사제직을 영속(永續)시키려는 희망을 없애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 이런 고려를 종합해 보고 주교는 지체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선택은 다블뤼 신부에게 떨어졌다. 다블뤼 신부는 11년간의 활동과 이 나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진정한 선교사로서의 아주 사도적인 열성과 견실한 덕행으로 분명히 가장 자격 있는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이 무거운 책임을 이 거룩한 사제에게 말하자면 강제로 떠맡기기 위하여 그의 겸손과 싸워야 했다.

(‘다블뤼 주교의 활동’ 중에서, 327~328쪽)


철종이 승하하자, 권력이 다른 손으로 넘어갔다. 그때까지 전권을 쥐고 있던 대신들은 면직되고 다른 대신들이 임명되었다. 이 궁중 혁명이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던가. 맨 처음에는 그것을 아주 명백히 알 수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갖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품기도 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백성의 정신에 일어났던 명백한 변화, 계속 늘어나는 개종의 수효, 중국인들의 오만에 가해진 무서운 교훈의 여파 따위는 모두가 희망을 품게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에 박해를 가했던 당파가 권력을 장악한 것, 비교적 온건파로 알려진 시파(時派) 사람들을 물리치고, 항상 복음을 적대시하는 벽파(僻派) 사람 중에서만 고관들을 뽑는 새 정부의 제도, 그리고 또 다른 징조들이 새롭고 무서운 폭풍우를 점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1864년 8월(양력)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보낸 아래 편지가 이 상황을 명백히 설명한다.

(‘고종 초의 한국 교회’ 중에서, 456쪽)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관장이 물었다. “장(張, 베르뇌 주교의 조선식 성)이오.” “조선에 무엇 하러 왔소?” “영혼들을 구하러 왔소.” “이 나라에 온 지 몇 해나 되오?” “10년이 되오. 그리고 이 동안 나는 자비로 살아와서 거저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물이나 나무까지도 거저 얻지 않았소.” 주교는 선교사들이 본국에서는 생활필수품이 없어서 순전히 돈을 모으려고 조선에 왔다고 주장하는 외교인들의 무함을 빗대놓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을 석방하고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면 복종하겠소?” “당신이 직접 나를 강제로 데리고 간다면 가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겠소.” “하지만 우리는 당신네 나라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그리 데려갈 수가 있겠소. 당신 대답은 조선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구려.” “좋으실 대로 해석하시오. 나는 당신 손안에 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Ⅰ’ 중에서, 500~501쪽)



간행사

일러두기

제2편 시련과 발전의 한국 교회
제3권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제1장 1840년 전후의 한국 교회
제2장 제3대 교구장 페레올 (J. Ferréol) 주교
제3장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활동
제4장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순교
제5장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
제6장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활동
제7장 메스트르 (J.A. Maistre) 신부의 활동

제4권 철종 대의 한국 교회
제1장 제4대 교구장 베르뇌(S. Berneux) 주교
제2장 전교 활동의 확대
제3장 다블뤼(A. Daveluy) 주교의 활동
제4장 경신박해(庚申迫害, 1860)
제5장 민란과 한국 교회

제5권 병인박해
제1장 고종 초의 한국 교회
제2장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의 순교자들 Ⅰ
제3장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의 순교자들 Ⅱ

참고문헌
색인


글쓴이  샤를르 달레 신부

Claude-Charles Dallet

1829년 10월 18일 프랑스 오트마른(Haute-Marne) 주의 랑그르(Langres)에서 태어났다. 랑그르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1852년 6월 5일 사제품을 받았다. 같은 해 인도 마이소르Mysore 대목구로 파견되어 블랙팔리(Blackpally) 본당과 마이소르 본당에서 사목했다. 1860년 건강 악화로 프랑스에 귀국하여 1862년 프랑스 제국 인쇄소에서 타밀어와 칸나다어 글자의 펀치와 펀치 블록 조각을 지도했고, 이후 마이소르로 복귀했으나 1867년 다시 건강 문제로 귀국하여 1869년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를 담당했다. 1871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기부금 모금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과 캐나다 등지를 여행했다. 저술 활동에도 힘쓴 그는 『논쟁교리문답(Controversial Catechism)』(1859년)을 비롯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Le Séminaire des Missions-Étrangères de Paris)』(1871년),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l’Église de Corée)』(1874년) 등을 펴냈다. 1877년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 중국 동북부, 북경, 인도차이나 남부를 방문하던 중 병을 얻어, 1878년 4월 25일 베트남 케소(Ké-so)에서 선종했다.​


옮긴이: 안응렬

불문학자이며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가톨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37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95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후 주불 한국 대사관 참사관으로도 활동하였다. 2005년 향년 94세로 타계하였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인간의 대지》 등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으며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등 다수의 가톨릭 서적을 번역했다. 또 《한불사전》을 편찬해 196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과 공로훈장을 받았다.


옮긴이: 최석우 몬시뇰

최석우는 192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50년 성신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다. 1956년 벨기에 루뱅 대학교 신학석사를 1961년 독일 본 대학교 신학박사룰 취득한 후 1962~75년 이문동, 양화진, 가회동, 명동, 삼각지 성당에서 사목했고 1975년부터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사장, 명예소장 등으로 봉직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는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 기사장 수훈했다. 2001년 명지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5년 3월 10일 몬시뇰(명예 고위 성직자)에 서임되었고, 2009년 7월 20일 선종했다.


[병인박해 자료 연구](1968),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1982), [한국 교회사의 탐구]Ⅰ,Ⅱ,Ⅲ(1982~2000) 등을 짓고 上屋吉正의 [미사](1990), A. Franzen의 [세계 교회사](2001), H. Jedin의 [세계 공의회사](2005)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한국 천주 교회의 역사]외 10여 종의 저서,9종의 역서,교회사 관련 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