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축소가 가능합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70년을 함께한

부인 강인숙이 들려주는 ‘인간 이어령’의 이야기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이 남편 故 이어령 선생에 관해 쓴 에세이 『만남: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70년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동갑내기 부부이자 친구이자 연인으로 이어령 선생과 일평생을 함께해온 강인숙 관장이 “그와의 70년 역사를 정리해보기로” 한 것이다. 스무 살의 이어령 선생이 “까까머리를 막 기르고 있는 대학 신입생의 모습”으로 처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아흔 무렵의 그가 투병 끝에 운신하지 못하게 된 모습이 안쓰러워 “마주 잡고 큰 소리로 통곡했”던 이별의 시기까지, 함께 울고 웃었던 70년의 세월을 담았다. 부록에는 특별히 이어령 선생의 넷째 형과 외사촌 누나가 쓴 글을 함께 수록하여, 강인숙 관장이 잘 알지 못하는 이어령 선생의 어린 시절과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하기도 했다. 또한 이어령 선생이 부인 강인숙 관장에 대해 쓴 글 한 편도 수록했다.


2022년에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도 어느덧 2년 넘는 시간이 지났다. 강인숙 관장은 이어령 선생과 “가장 가까이에서 산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증언을 남겨야 할 것 같은 채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하루에 두 시간밖에 글을 쓸 수 없는 막바지의 시간을 바쳐서” 이 책을 마무리하고자 한 것이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던 이어령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전 문화부 장관으로서 수많은 활동을 하며 업적을 남겼지만, 강 관장은 자신이 보아온 그는 행정가나 정치가나 위인이 아닌, 한 사람의 ‘예술가’였노라고 말한다. 이 책은 강인숙 관장이 “가장 가까이에서 산 사람”으로서 보고 느낀 이어령 선생을 최대한 윤색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하고자 한 노력의 기록이자, 그만큼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한 사랑의 기록이다.

목차

1부


이어령을 기른 흙과 바람

중부지방의 풍토와 전통문화 / 가족 관계 소묘


네오필리아와 김치

네오필리아 / 고전 연구도 방법론은 새것으로 / 네오필리아의 원천 - 아버지 / 어머니의 식탁


이어령과 어머니

의욕 과잉의 막내아들 / 막내아들의 생태학 / 외갓집 / 금계랍의 맛 / 은화 한 닢의 무게 / 귤과 필통 / 모자 간의 속독 경쟁 /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 / 이장移葬과 굴건제복 / 모든 책을 다 바치고 싶은


아버지 이어령의 두 가지 소원


이어령과의 만남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사람 / 동숭동 시대의 개막 / 장난감 놀이 / 비상시의 놀이터 / 남남북녀 / 양보의 마지노선 / 연인의 자리, 아내의 자리 / 동시대인 / 자기 일 자기가 하기 / 우리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나에게 그대는


2부


모놀로그와 다이얼로그

다변증 / 다이얼로그의 씨앗


장관 이어령의 희한한 이벤트들

이벤트의 신선도 / 영상의 시각화 /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살풀이춤 / 그네 매스게임


이어령과 골프


3부


1955년과 「이상론李箱論」


『문학사상』

『문학사상』의 탄생 / 『문학사상』의 관철동 시대 / 나와 『문학사상』 1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의 태동기


부록


어린 날의 기억들 -이서영(이어령의 넷째 형)

만세 소리 속에서 / 아버님의 걱정 / 천재의 고독 / 가정통신란 / 그가 듣는 것, 보는 것, 생각하는 것 / 생인손 / 어린 왕자


나의 자랑스러운 고종사촌 -원정희(이어령의 외사촌 누나)

할아버지 형제분들 이야기 / 우리 집 정초 풍경 / 고모님 댁과 고종사촌들 / 내 고향 / 이어령 씨 외할머니 이야기 / 우리가 겪은 6·25 / 우리 집 제삿날 풍경


정복되지 않는 네모꼴의 신비 -이어령


글쓴이 : 강인숙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1933년 10월 15일(음력 윤 5월 16일) 사업가의 1남 5녀 중 3녀로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이원군에서 살다가 1945년 11월에 월남했다.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1958년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