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회의하는 자 홍세화의 투명한 고백
진보 지식인 홍세화가 2014년 4월 16일 이후 6년 동안 <한겨레>에 쓴 칼럼을 책으로 묶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 속의 ‘미안함’을 글로 썼다고 고백한다. 요행으로 “살아남은 자”는 속절없이 죽은 세월호 학생들에게, 몰상식과 광신의 늪에서 고통을 겪는 성소수자들에게,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에게 미안해한다.
홍세화는 부의 대물림이 아니라 가난의 대물림을 본다. 그는 우리에게 요청한다. 가난이 죄가 되는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발언할 수 없을 때, 부러움 때문이든 시기 때문이든 부의 대물림을 보는 대신 대물림되는 가난을 보자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한결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말한다. 단지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지 않느냐고. 세상을 혐오하고 개탄하기는 쉬운 일이다. 개탄을 넘어 분노로, 분노를 넘어 참여와 연대와 설득으로 나아가기는 고되다. 모두가 타인을 설득하기를 포기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토마 피케티는 끝까지 민주주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를 통치하는 자들을 위해 책을 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쓴다. 시민들, 노동조합원들, 모든 성향의 정치 활동가들을 위해 쓴다.”
목차
서문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1부 인간의 몸은 평등한가
두 노동자 이야기
우리가 김용균이다
오만함의 층위
계속 떠들 것이다
‘굴뚝 농부’가 된 노동자
2부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는 앨라이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
혐오의 뿌리
해방의 세기
3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확증편향의 함정
아이 낳으라고 하지 말라
아이들이 안쓰럽다
지적 인종주의를 넘어서
고리를 끊어야 할 책임
민주공화국의 학교를 위하여
4부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안고
가난의 대물림과 정치
기억을 간직한다는 것
비대칭성의 무서움
실질적 자유를 위하여
“다음 혁명에는 바지를”
정의에는 힘이 없다지만
“왜 우유를 안 사?”
성지라면 성지다운
가해자들의 땅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5부 갈 길이 멀더라도
무엇으로 진보인가
거리낌 없는 타락의 정치
상징폭력과 정신의 신자유주의화
관제 민족주의의 함정
새로운 성채를 짓는 일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마키아벨리의 겸손함
요동치는 황금기와 무서운 상상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
야당의 야성은 어디에
테러보다 무서운 것
외침의 빈자리
갈 길이 멀더라도
글쓴이 : 홍세화
홍세화가 말하는 홍세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 회사원, 관광안내원, 택시기사에 이어 신문기자와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를 거쳐, 급기야 은행장의 직함까지 갖게 되었다. 주식도 없고 스톡옵션도 없는,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일 것이다.
두 가지 우연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아무 카페든지 한 귀퉁이를 빌려서라도 빈대떡 장사를 해보겠노라고 마누라와 꽤나 돌아다녔다. 그때 수중에 돈이 조금 있었다면 지금 열심히 빈대떡을 부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빈대떡을 아주 잘 부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대신 ‘나는 빠리의 빈대떡 장사’? 글쎄,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 가지 우연과 몇 가지 필연,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란 게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양철북』의 소년도 아니면서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는 게 주책없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하릴없는 수작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오래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따라서 나에겐 나르시시즘이 있다. 내 딴에는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자율 통제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 하므로.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 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