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할 ‘제자 되는 길’의 전형적 모범을,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의 젊은 어부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반석이 된 시몬 베드로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시몬에 대해 복음서 본문이 제공하는 객관적, 역사적 이해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기록이 채워 주지 못하는 공백을 주체적 독서와 성찰을 통해 밝혀 보려 시도한다. 곧, 이 책은 시몬에서 베드로로 변화하며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번민한 한 제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또한 제자인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번민한 한 제자의 삶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루카 5,8).
로마 바티칸에 들어서면 성 베드로의 이름이 붙은 거대한 광장과 대성전을 마주하게 된다. 멀리서는 읽기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대성전의 둥근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물 아래로 라틴어로 된 짤막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대는 베드로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의 성문들도 그것을 내리누르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6,18). 시몬 베드로, 그의 이름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이천여 년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을 시초부터 상상할 수 없다. 복음서를 살펴봐도 그는 제자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빈번히 거명되는 인물이다. 또한 갈릴래아 호수의 젊은 어부였던 그는 초대 제자 집단의 머리가 되었으며, 스승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통한 구속 사건과 후대 교회의 역사를 이어 주는 가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몬 베드로는 주로 신학적, 역사적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이해되고는 했다. 물론 그러한 차원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토대이며,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그가 차지했던 신학적, 역사적 위상의 정립은 그리스도교의 자기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요구였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끈 야고보의 순교(62년경)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70년)의 영향으로 유다계 공동체는 거의 소멸 위기에 처했었고, 비유다계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전통이 더 잘 보존될 수밖에 없었다. 곧, 시몬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남을 수 없던 상황이라 예수 사후 그가 어떻게 제자의 길을 걸었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는 사후 제자 바오로와 달리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몬 베드로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그의 내면적 요소를 간과하거나 배제한다면 어떻게 그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겠는가? 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단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방법만 고집한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객관적 자료의 부족은 주관적, 주체적 성찰로 그 공백을 채워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지 않는가? 이 책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바라보는 시몬 베드로의 전통적 위상을 원칙적으로 염두에 두되, 네 복음서가 전하는 그의 모습을 스승 예수와 제자 시몬의 관계에 주목하여 성찰하려 한다. 곧, 우리 자신의 체험과 성찰로 자료의 공백을 메워 나가면서 객관적, 주관적 독서 작업을 동시에 시도하고, 젊은 어부에서 교회의 반석이 된 시몬의 역동적 면모를 드려내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번민한 한 제자의 삶을 마주할 것이다. 제자 시몬은 스승 예수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로 고백했고, “제 목숨이라도 내놓겠”(요한 13,37)다고 장담했으며,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마태 26,35)다고 단언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 그렇지만 결국 다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라고 고백했고, “나를 따르시오”(요한 21,19)라는 스승의 마지막 명령에 응답하여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밀알’(요한 12,24)이 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적 좌절을 딛고 일어선 시몬 베드로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또한 제자인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다.
<책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을 전제로 다시 질문하건대, 시몬은 스승에게서 무엇을 듣고 따라야 했던가? 이 사건 이전에 스승이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물었을 때, 시몬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병행: 마르 8,29; 루카 9,20)라고 고백했다. 고백에 이어서 스승은 시몬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축복을 들려주었다. “그대는 복됩니다, 시몬 바르요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계시하신(apokalyptō) 것입니다”(마태 16,17). 시몬의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시몬에게 ‘열어 보여 주신’, 곧 ‘계시하신’ 것이었다. 아마도 스승의 말씀은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에 대한 주류층의 공통된 견해가 아니었을까? 시몬도 자기와 함께 지상의 길을 걸으며 같은 생활을 했던 스승에게 인간 이상의 신앙고백을 한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또 그분의 말씀을 자기 뜻대로 들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깊은 절망을 경험했을까? (187-188쪽)
마지막 순간에 스승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라고 한 시몬의 얼굴이 심하게 흔들렸다. 공포의 순간에 스승을 스승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그 사람’으로 부른 시몬! 고통과 사랑이 뒤범벅된 순간에 스승의 시선이 시몬의 가슴에 깊이깊이 녹아들었다. 자신을 부인하는 제자의 말을 듣고도 스승의 시선에는 미움이나 실망이 한 오라기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시선 속에 녹아 있는 사랑의 고통이 마치 상처의 고통을 더욱 아리게 하는 소금처럼 시몬의 엷은 가슴에 깊은 참회의 순간을 만들며 날아와 박혔다.
그날 밤, 정작 스승을 고통스럽게 한 자들은 유다인도 로마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시몬에게 분명해졌다. 시몬은 스승의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한 자신이 스승의 고통이었음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제자이자 친구(요한 15,13-15 참조)처럼 대해 준 스승을 포기했던 시몬, 이제야 친구를 포기하는 것이 적들의 적개심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282쪽)
책머리에
들어가며
I. 초대: 새 삶으로
1. 그들은 어부들이었다(마태 4,18)
2.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루카 5,5)
3. 당신은 케파라고 불릴 것입니다(요한 1,42)
II. 척안소붕斥鴳笑鵬(장자, 소요유):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
4.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5. 그대는 복됩니다, 시몬 바르요나!(마태 16,17)
6.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마르 8,33)
III.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7.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8. 나와 당신 몫으로(마태 17,27)
9.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마태 18,21)
IV. 백인가도白刃可蹈(자사, 중용): 날 선 칼날도 밟을 수 있으나
10. 우리가 누구에게로 물러가겠습니까?(요한 6,68)
11. 제 발만은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요한 13,8)
12.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13.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
V. 성인무위聖人無爲(노자, 도덕경): 성인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14. 둘은 같이 달렸다(요한 20,4)
15.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요한 21,15)
나오며
참고문헌
글쓴이 : 박종구
예수회 사제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파리 예수회 대학과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카를 바르트(Karl Barth)를 주제로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예수회 말씀의 집에 머물고 있다.
저서로는 『어찌하여 나를』, 『열정과 회심』, 『자비의 하느님, 인간의 수수께끼』,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교 교의의 역사적 형성 연구』, 『다윗: 야누스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성서 시대 사람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리더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