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마지막 단어였어.”
일상에 깃든 불안을 닦아내어
거울처럼 ‘나’의 얼굴을 비추는 시
문학동네시인선 182번으로 심언주 시인의 세번째 시집을 펴낸다. 2004년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심언주는 첫 시집 『4월아, 미안하다』(민음사, 2007)에서 세밀한 감수성과 언어 의식이 돋보이는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두번째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민음사, 2015)를 통해 “시적인 소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시인 김언)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는 나비와 꽃, 식빵과 우유, 치과와 동호대교처럼 일상적인 배경과 사물들이 등장한다. 특징적인 점은 이것들을 심상한 일상의 풍경으로 관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응시하며 그 대상의 이름을 여러 번 곱씹음으로써 일상 속에 깃든 불안이나 위험, 슬픔 같은 감정들을 발견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어둠을 응시하면서도 우울로 빠져들지 않는다. “입술이 굳어가고/ 턱이 굳어”가는 상황에서도 “큰 소리로 말”(「헌터」)하려 노력하고, “아맘니, 아맘니” 중얼거리며 “검게 칠해도 빈틈을 비집고”(「다음 도착지는 암암리입니다」) 뜨는 별빛을 찾아낸다. 특히 시인은 언어유희를 통해 무겁지 않게 상황을 풀어내는데, 같은 단어를 반복해 사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풍성한 말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멸치는 사투를 벌이고/ 나는 화투를 친다”(「사투와 화투」), “하양에게선 히잉 히잉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마스크」), “오요 우유 모음을 모으며”(「과거도 현재도 주성분이 우유입니다」), “수북하던 수국이 졌다”(「수국 아파트」) 같은 시구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눈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히 입으로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목차
1부 꽃에 다다르는 병
점점점/ 나비가 쓰고 남은 나비/ 정형외과/ 백야/ 파종/ 피고인/ 다음 도착지는 암암리입니다/ 그늘/ 식빵을 기다리는 동안/ 수평선/ 다닥다닥 빨강/ 꽃병/ 수국아파트
2부 뭉치면 한 마리, 흩어지면 백 마리
그래그래/ 올리브, 유/ 인터뷰는 사양할게요/ 과거도 현재도 주성분이 우유입니다/ 정말을 줄까 말까/ 방치/ 우기/ 계단이 오면/ 처음인 양/ 선두를 존중합니다/ 먼지 고양이/ 기우뚱하면 안 되니까/ 아무렇게나 엉키고 쉽게 끊어지지만/ 괜찮아요, 좀 늦긴 했지만/ 마스크/ 오후 혼자서
3부 둔부도 없으면서 두부는 서 있다
몽상가/ 돌이켜보면 모두 파랑/ 헌터/ 이기려고 두부가 되는지 져서 두부가 되는지/ 봄날/ 밤마다 감자/ 벚꽃 습관/ 노랑/ 극단적 선택/ 동호대교/ 최소한의 여름/ 발레리나/ 나는 나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자욱해질 때/ 사람이 될 듯 말 듯/ 복어는 로또 공처럼
4부 내 울음은 내다 걸지 못합니다
비눗방울로 메아리를 낳자/ 염치읍민입니다/ 불면/ 남의 일처럼/ 사투와 화투/ 새를 끄고 싶다/ 그도 염치읍민입니다/ 돌로 사는 법/ 숲, 숲 부르면 쉿, 쉿/ 양면성/ 주의 사항/ 쓸데없는 책임감/ 파닥파닥이 지치면 바닥이 된다/ 속옷 빨래라서/ 묻지도 않고
해설_나를 닮은 시, 시를 닮은 나
박혜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