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결코 벌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알몸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몸인 상태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둘은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 이른바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바로 이 책의 제목입니다.
저자는 먼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접근이 금지된 나무 열매를 따서 먹은 이유를 들여다봅니다. “너는 무엇이 좋은지(선)와 무엇이 나쁜지(악)를 아는 신들처럼 될 거야.” ‘신들’처럼 되고 싶었던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하고, 올바르고, 강한 존재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신들’이라는 우상을 닮기를 바라고, 우상이 상징하는 성공이라는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모습은 아담과 하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기준에 따라, 내가 그 기준에 미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그런데 ‘마땅히 되어야 하는 나(거짓 나)’에 비해 ‘있는 그대로의 나(참나)’는 열등해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자기단죄라는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이 죄의식이 자신을 ‘벌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게 하고 두려움을 만들어냅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사실, 아무도 그렇게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인간 스스로 알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알몸이라는 인간성·피조물성에 판단을 내려 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결국 처벌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저자는, ‘서막’에서 자기처벌에 대한 가장 좋은 예로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를 살펴봅니다. ‘제1부’에서는 우리의 세계, 곧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판단, 죄책감,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자기처벌로 이어지는지 설명합니다. ‘제2부’에서는 우리가 속해야 할 하느님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제3부’에서는 하느님은 세상을 우리식으로, 이원론적으로 분열되게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제4부’에서는 원죄, 판단하지 않으시는 빛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참나true self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알몸은 죄의식을 느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무엇임을 강조합니다. ‘제5부’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어, 그분의 자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부록’의 마지막에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글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묵상을 쉽게, 또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중간중간 복음 말씀을 설명합니다. 독자가 오해할 만한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게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또 성인들의 이야기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예로 들어주어, 저자의 묵상이 독자의 마음에 한층 더 와닿게 해줍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알몸인 것을 알았을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몸을 가리기 위해 무엇을 입으려 합니까? 돈, 지위, 명예 등으로 참나를 감싸 숨김으로써 마땅히 되어야 할 모델이라고 여기는 ‘훌륭하고 강한 모습의 나’, 소위 ‘잘나가는 모습의 나’라는 옷만을 입으려 하지는 않나요? 그러한 것들을 얻지 못했을 때 자신을 자책하고 스스로 벌주고 있지는 않은가요?
저자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결코 벌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알몸인 우리,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일러줍니다. 저자의 묵상을 찬찬히 곱씹으며 따라가보시기를 권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창세 1,27),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갈라 3,27), “사랑을 입어”(콜로 3,14) 살아가야 함을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부정하고 죄의식과 처벌의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환상입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가 이러한 환상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와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책 속으로
우리는 우리가 다만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알몸의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훔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다. 벌거벗은 채로 우리는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의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빠Αbba’로부터, 우리가 창조된 ‒ 알몸 ‒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부터 이 신적 자유를 받았다!
_27쪽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느님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까?’ ‘그 무엇’은 누구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에게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곧 빈틈없이 경계해야 마땅한 것은 자기 파괴력이다. 자신을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영혼과 육신을 한꺼번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우리 내면에서 지독히 들끓고 있는 경향들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_43쪽
우리가 우상들의 죄지은 자식들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결백한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신들처럼’ 되고 싶지만, 우리는 ‘그냥’ 사람으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 같은 우리, 우리의 우상들처럼 되고 싶다.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우리가 아닌 것을 놓아버리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_52쪽
예수는 ‘신들’(우상들)의 힘을 부정하고 그 대신 참하느님과 진실하신 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자유를 누린 유일한 인간이셨다. 겉으로는 힘이 승리한 것 같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가 승리했다. 즉 예수께서는 일으켜지셨다. 부활하신 것이다.
_59-60쪽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예루살렘 성경)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판단은 곧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판단받는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내린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한다.
_96쪽
고통과 상처에는 벌이 아니라 자비가, 단죄가 아니라 연민이 필요하다. 밤에 외롭고 허전하고 두려워서 우는 아이에게 아버지나 어머니가 벌을 주는가? 불행히도, 세상의 부모들은 때때로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져 벌을 준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벌주지 않으신다. … 우리를 벌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성령을 거스르는 죄,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죄들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짓는 죄들의 이면을 보시고, 비참함 속에서 죄가 생겨나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_139쪽
비록 아드님이 판단하는 세상에 들어오셨지만, 그분은 우리의 분리된 사고방식, 분리하고 쪼개고 판단하는 우리의 성향과 당신 자신을 분리하셨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너희는 선과 악의 나무를 먹지만, 나는 오직 생명 나무만 먹는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사셨지만 판단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원론적 세상에는 참여하지 않으셨다.
_172쪽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 사랑받고 있는 이 나라를 받아들이면, 판단하는 우리의 세상은 터무니없이 여겨지고,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이상理想은 웃음거리가 된다. 스스로 벌주는 우리의 세상에서 구원되는 것은 어인 자유인가. 우리가 알몸인 것에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것은 어인 해방인가.
_193쪽
죄를 당신의 것으로 뒤집어쓰신 예수께서 정말 모든 시대의 죄인이 되셨는데도, 여전히 아버지를 믿으셔서 일으켜지셨다는 사실은 나 역시 일으켜질 것을 보증한다. 나도 의롭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1코린 1,30)이 되게 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실”(2코린 4,14) 것을 알고, 죄인인 그리스도가, ‘죄가 된’ 그분이 일으켜지셨고 거룩하게 되셨다면, 나 또한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안다.
_233쪽.
일러두기
감사의 말
글을 시작하며
서막
프로메테우스
제1부
우리 세상
안전과 두려움
십자가
자유
판단하기
마땅히 그래야 한다 ·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 대 실천(생각 대 행동)
제2부
하느님의 세계
비유와 누룩
부정
용서는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프란치스코
하느님은 판단하지 않으신다
제3부
두 창조
하느님은 악을 모르신다
환상과 죄의식
죄들로 인한 고통
벌주시는 하느님?
악마
제4부
원죄와 알몸
죄들과 자기용서
그리스도는 판단하지 않으신다
최후의 심판
부자와 라자로
빛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참나True Self
제5부
우리의 거짓 나
탕자
화해
부록
“나를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 ‒ 묵상 ‒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그리스도교의 역설
최후의 유혹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