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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시작하는 사유의 자유
미켈란젤로에서 니체를 읽고 샤갈에서 제자백가를 읽다

철학이 어렵고 지루한 이유는 논의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을 “모호하게 느껴지는 개념들을 벽돌 삼아 쌓아가는 논리의 성”이라고 정의한다. 벽돌 자체도 쥐기 어려운데 그걸로 엄청난 성을 쌓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그 성에 들어가기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의 이러한 장벽은 소통 방식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철학은 학문이기 전에, 한 인간이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므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철학과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얘기가 아닌데 우리가 학창 시절 괜히 어렵게 외웠던 철학의 인물과 개념들이 ‘그림’이라는 매개를 만나 완전히 새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하나의 작품을 미술사적 논의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토대로 자유롭게 해석한 다음 그로부터 연상되는 철학적 개념을 특유의 위트와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천장화 <천지창조>를 보다가 문득 아담의 ‘건방진’ 자세에 주목한 다음, 신이나 종교와 필연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던 철학의 역사를 짚고, 그 가운데서도 ‘신에게 도전하기’ 종목이 있다면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를 소개한다. 쌓여 있는 책을 그리는 전통이 있었던 조선시대의 ‘책거리’ 작품들을 소개하며 서양 원근법에선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구도와 아찔한 긴장감,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는 균형과 조화에 집중한다. 이 균형과 조화는 다양한 사상이 폭발적으로 만개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서로의 사상을 발전시키며 함께 성장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철학의 역사 역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역사”임을 다시 강조하며, 샤갈(Marc Chagall)의 그림 <나와 마을>에서 ‘시선의 마주침’을 강조하기 위에 눈과 눈 사이에 그려 넣은 흐릿한 선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가 그렇게 상대의 눈을 보며 그리는 투명한 선들이 그물처럼 세상을 덮으면 이 세상은 좀 더 아름답고 포근한 곳이 되지 않을까. 세상은 그렇게 우리 시선의 방향과 높낮이가 다양해서 더 아름답다고 믿는다.”(p.70)

그림에서 철학이, 철학에서 세상이 열린다
어려움 없이 보고, 두려움 없이 생각하는 법

한국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집필과 강의를 이어가고 있는 정치철학자 이진민은 오래전부터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바꾸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학계의 소수를 만나는 삶보다는 일상의 다수를 연결하는 삶을 선택한 그의 ‘다정함’은 이 책의 곳곳에서 돋보인다. 청량한 여름 빛을 담은 유리병 그림을 앞에 두고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에 의문을 표하며 “내 안에 담고 있는 것이 썩어가지는 않는지, 그 안에서 잘못된 것은 없는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인간(특히 권력자)의 중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17세기 유럽 왕족과 귀족의 사치품이었던 거대한 태피스트리(벽이나 가구를 장식하기 위해 색실을 짜 넣어 모양이나 그림을 표현한 직물 공예)를 만드는 데 10~12세의 ‘가늘고 말랑말랑한 여린 손끝’이 동원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이키 공장에서 시간당 200원을 받으며 착취당하는 제3세계 어린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때로는 우리가 미술관에 ‘감탄할 준비를 하고 간다’는 점이 우리의 눈을 가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여쁜 외양만 쓰다듬기보다는 그 사람 내면의 그늘과 고통을 인지하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더 아름답듯이, 우리가 다소 무방비적으로 감상하러 가는 작품들 안에 제법 그늘이 많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즐기는 편이 나와 그 작품 간의 좀 더 입체적인 만남이 아닐까.”_271쪽

또 클림트(Gustav Klimt)에게 의뢰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천장화가 포르노그래피라는 혹평을 받은 사연, 황홀하도록 찬란한 가로등 불빛을 담은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의 그림에 숨겨진 ‘힘과 속도’에 대한 파괴성, 따뜻하고 천진한 시선이 돋보이는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들이 파시즘의 광기를 뚫고 피어난 예술적 성취라는 점 등 하나의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을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을 종횡하며 풀어낸다. “얼큰한 유머와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가득한”(작가 정여울) 이 책은 “마음이 고플 때 펼치기 좋은 식탁”(정치철학자 김만권)이 될, 친절하고 든든한 인문서이자 입문서이다.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에 따라 세상이라는 화폭에 우리 존재를 키울 수도, 없앨 수도 있다.”_249쪽

목차
들어가는 말

1.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발칙한 시선
: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말했나

2. 투명한 유리병에서 인간의 품성을 찾다
: 공자와 베버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3. 기묘한 균형으로 쌓여 있는 책 구경
: 너도 옳고 나도 옳을 때 우리는 어떻게 공존할까

4. 빨간 사과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
: 인간은 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가

5. 공작새와 오리의 서열은 누가 정하나
: 허영심과 불평등, 그리고 법률

6. 가로등과 매화가 달빛을 대하는 방식
: 아름다움의 속도를 철학하다

7. 왜 클림트는 혹평에 시달렸을까
: 정의를 위한 불의의 그림

8. 정의는 왜 여신이 담당하는가
: 양날의 칼을 쥔 자의 책임

9. 여신의 눈을 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정의로운 눈 뜨기와 공정한 눈 감기

10. 가면 쓴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 집단의 광기와 개인의 자유

11.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신과 죽음, 그리고 전쟁 속에서 발견한 개인

12. 소녀들의 눈을 멀게 한 카펫
: 태피스트리 작품들과 나이키 공장의 아이들

13. 공이 굴러간 곳에서 니체를 다시 만나다
: 그늘 속 어른과 빛 속의 어린아이

감사의 말

저자 : 이진민
사 남매, 딸 딸 딸 아들 중 눈치 없이 셋째 딸로 태어나 책탐 많은 아이로 자랐다. 세상 보는 눈을 가지고 싶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맥주를 콸콸 마시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지만 가끔은 이 산이 아닌가 보다 하는 나폴레옹의 마음을 느꼈다. 그러다 정치철학을 만났고 이거다 싶었다. 정치사상에 깊이 발을 담그며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랜다이스대학교에서 멜론 장학금을 받으며, 그리하여 또 맥주를 마시며 정치철학을 전공했다.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학계의 소수를 만나는 논문보다는 일상의 다수를 만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 비슷한 시기에 박사와 엄마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획득했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움켜쥐고 살았다. 철학과 육아를 버무린 첫 책이자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인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에 이어 철학과 미술을 버무린 두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두 아이에게서 듬뿍 받는 사랑과 시원한 독일 맥주가 삶의 원동력. 현재는 독일 뮌헨 근교 시골 마을에 살면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온라인 특강을 한다. 아직도 가슴속에 쓰고 싶은 책이 여러 권 들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