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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와 여행자

믿는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도 신앙생활의 일부로 생각하고 국내 여러 성지와 외국, 특히 이스라엘 예루살렘,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 생퀘르 성당과 루르드,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발현지 그리고 2007년에는 스페인 산티아고도 다녀왔다.

그러나 이러한 여행은 진정한 성지 순례가 아니었다. 꽉 짜인 일정에 맞춰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훑어보는 것, 사진 찍고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그것도 좋은 호텔에서 자고 잘 먹고 호화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 이런 스타일은 유럽인들의 눈으로 보면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관광(Tour)이다. 그들은 철저히 고행하고 걸어서 순례자의 길을 음미하고 묵상한다. 가끔 말을 타거나 자전거를 타기는 한다. 그래, 바로 그거야!

12세기(118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산티아고를 그리스도교 3대 성지로 선포했다. 이 순례길을 걸은 사람은 대사의 은총을 받는다고도 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등 수많은 순교자를 낸 로마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큰 야고보 사도가 묻힌 스페인 산티아고가 그리스도교의 3대 성지이다. 야고보는 사도시대에 스페인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기원 후 44년 헤로데 왕에게 잡혀 참수, 순교한 첫 사도이다. 그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한 다음 몰래 바다를 통해 스페인으로 옮겨 매장했다.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잊혔다가 813년경 한 수사(파이요)가 들판에 별빛이 내리 비추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가서 보니 무덤과 유골이 있었다. 로마교회가 이를 성 야고보의 시신으로 판정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3세기에는 연간 약 50만 명이 순례했다고 한다. 요즘은 연간 15만 명 정도가 이곳을 순례하는데, 2000년 이후 한국인 순례자가 급격히 늘었다. 여러 갈래 중 가장 보편적인 프랑스 길(약 800km) 완주율은 평균 15%, 한국인은 좀 독해서(?) 30% 정도라고 한다.

산티아고의 정식 이름은 ‘엘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 데 산티아고(El Camino de Compostela de Santiago)’이다. El은 정관사이고 Camino는 일반적으로 길을 의미한다. 스페인에서는 ‘카미노’라고 하면 이 순례길을 의미한다. 또한 Compo는 평지, 야지, 캠퍼스를 뜻하고, Stela는 별, San Tiago는 성 야고보를 뜻한다. 산티아고는 각 나라의 언어에 따라 달리 불린다(영어 St. James, 라틴어 St. Jacobus, 불어 St. Jacques 등). 또한 산티아고라는 도시 이름도 칠레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에 있는데, 진짜 원조 산티아고는 스페인 산티아고이다. 스페인에서 야고보 성인만을 칭할 때는 Diago라고 쓴다.

2011년 12월 25일, 성탄대축일 낮미사를 끝으로 성가대 지휘자 활동을 마감하고 본격 순례 준비를 했다. 지리산 종주(2박 3일 단독), 새만금 방조제 약 40km 단독 종주, 시화호 방조제 종주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장거리 순례에 필요한 고어텍스 의류, 등산화, 배낭, 기능성 속옷류 등을 구입한 다음,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30일 이상 입고 쓸 물건들을 잔뜩 담은 배낭(약 12kg)을 메고서 적응하는 훈련을 겸했다. 무겁지만 주님의 십자가에 비하면 깃털보다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드디어 내일(2월 29일) 출국이다.
경험자들은 이런 순례라면 단독 출정을 권유한다. 둘이나 셋이 가면 좋은 점도 있겠으나 사람마다 체력이며 다른 조건이 달라서 보조를 맞추기 어렵고,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개인 묵상이나 기도를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무려나 성목요일(4월 5일) 주님 만찬 미사를 산티아고 성 야고보 성당에서 참례하는 것이 목표이다. 날짜를 역산해 보니 34일 순례 여정이다.
서울에서 파리로 날아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남쪽 국경 소도시 Saint Jean pied de port(통상 줄여서 ‘생장’이라고 부름)에 도착하여 순례자(Peregrino) 등록을 한다. 그리고 해발 약 1,400미터의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산악지방이라 기후 변화가 심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맹수와 산적들이 흔해서 목숨을 걸고 다녔다는 길이다. 낭만적인 유람길이 아니다.

장장 800km….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를 걷는다. 약 34일 일정이다. 잠은 알베르게(Alberge)라고 하는 순례자 숙소(공립, 성당이나 수도원이 운영하는 곳과 사설이 있다)에서 잔다. 환자가 아닌 한 연이틀 숙박은 안 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

왜 걷는가?
기도와 묵상 그리고 성가를 실컷 하고자 한다.
인생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약 33년간 지휘자를 열심히 따라준 수천 명 성가대원들에게 감사하고, 혹시 오류가 있었으면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며, 수많은 은인들과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그 여정 중에 각국 순례자를 만나면 여러 언어로 친교하고 국위를 선양하고 신앙을 증거하면서… 행여 산티아고 순례를 꿈꾸는 분들은 여행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순례자가 될 것인지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가야 한다.
이번 길이 평생 한 번의 일일지, 성공(완주)할지는 주님만이 아실 터… 올해는 한국 나이로 66세가 되는 해이다. 더구나 카미노 길에서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몇 년 전에 심장(관상동맥) 시술을 받았고 혈압약을 먹는 터라 아내와 자녀들이 걱정할 만하지만 내일이면 늦으리…

순례의 길을 떠나며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기도를 청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     (시편 1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