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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 ‘천사의 집’에서 백여 명 소녀들의 ‘아빠’로 살아가는 홍승의 가브리엘 신부의 마르코 복음 묵상집. 이제는 성인이 된 ‘큰딸’ 훌리아에게 건네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쉽고 선명한 언어, 이미지 대비를 활용한 분석을 통해 색다른 복음 묵상이 전개된다.



과테말라 천사의 집 아빠 신부님이 들려주는 마르코 복음 이야기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에는 ‘천사의 집’이라는 여자아이들 보호시설이 있다. 이곳을 일군 이가 이 책의 저자 홍승의 신부다. 저자는 2006년부터 이곳에서 소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현재는 그 인원이 백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 빈곤과 학대, 폭력 등의 상처를 간직한 채 이곳으로 온 아이들이다.


소녀들의 ‘아빠’로 살아가는 다사다난한 일상 속에서 저자는 “한 번쯤 우아함을 찾고 싶다”는 마음에 복음서를 정리하기로 한다. “복음서를 읽어 준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당당하고 우아한 잔소리”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문제는 글을 쓰면서 당당한 잔소리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복음과 딸, 이 둘은 신부이면서 아이들의 아비로 살아가는 내 삶에 가장 익숙하고 가장 무거운 말입니다. 익숙함만을 생각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무게로 인해 쩔쩔맨 흔적이 도처에 보입니다. 복음서는 문자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삶으로 얻어 내야 하는 해석이란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살아 내지 못한 만큼 복음이 어려웠고, 그리 살아 내지 못한 내 삶의 허점과 타협을 눈으로 보아 온 딸이란 녀석은 더 어려웠습니다. 결국 당당하고 우아한 잔소리를 기대하면서 시작한 글이 딸에게 주는 자기 고백서가 되었습니다.”

(저자의 머리글에서)


저자는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을 택하여, “이미지 복선을 활용한 데칼코마니 대비 방식”을 통해 묵상을 전개한다. 총 16장으로 이루어진 마르코 복음서의 정중앙 8장 30절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기점으로 앞쪽과 뒤쪽이 같은 자리에 같은 이미지가 데칼코마니 방식으로 대비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면, 맨 앞 1장 2-8절의 세례자 요한의 설교(“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와 맨 끝 16장 1-8절의 부활한 빈 무덤에서 천사가 전하는 소식(“여러분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들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을 대비하여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의 전반과 후반을 순차적으로 대비하여 묵상을 전개하는 방식을 통해 독자들은 새롭고 특별한 성경 읽기를 체험할 수 있는데, 이러한 데칼코마니 대비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책 뒤편에 따로 성경 장절과 함께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은 그가 큰딸이라 부르는 훌리아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열한 살에 만나서 이제 스물다섯이 된 훌리아는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 본 ‘아빠’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못 알아들으면 오히려 시비를 걸어올” 테니 “쉽고 선명한 언어”로 성경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단다.


적은 나이가 아니라 오히려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는 이 땅의 청소년과 젊은이들, 그들에게 쉽고 선명한 복음 말씀을 통해 말을 건네고 싶은 어른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책 속에서
아이들과 살고 있는지 열네 해입니다. 열정이 몸에서 입으로 옮겨 온 탓인지 바깥 잔소리도 속 잔소리도 부쩍 늘었습니다. 잔소리들을 정리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잔소리에 대한 정당성을 갖고 싶었는지는 모호합니다. 다만 아이들과 사는 일이 자잘하고 조잔한 과정이라서 한 번쯤 우아함을 찾고 싶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이유로 복음서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편지로 복음서를 읽어 준다는 핑계로 아이들 모두에게 당당하고 우아한 잔소리를 하고 싶었던 거지요.(6쪽)


예수에 대한 상징이 물고기라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예수가 땅 위에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땅 위에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물고기의 운명, 그래서 바다를 향해 서걱거리는 모래바람과 마주하고 걸어가야 하는 물고기의 운명,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 온몸 가득했을 그리움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 않니?(15쪽)


사실 어떤 충고가 필요할 때 누구랑 이야기하느냐가 무척 중요하잖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는 걱정하지 마. 그냥 머무는 거야. 네 상황과 문제를 꺼내 놓고 하느님과 머무는 시간을 갖는 거야. 대화를 해도 되고 그냥 하느님이나 예수를 떠올리면서 머물러도 돼. 물론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머문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짧게라도 자주 해 보면 빛이 들어서는 느낌을 알게 될 거야.(80쪽)


예수가 물 위를 걸은 이유는 특별한 게 아니었어. 역풍에 “노를 젓느라고 애쓰는”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던 거야. 쉬지도 못하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서 역풍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달려가는 모습이지. … 물 위를 걸어왔든 하늘을 날아왔든 무엇이 중요하겠어. 여기서 중요한 건 왔다는 거야. 마지막 하나를 내어놓은 제자들을 역풍 속에 외로이 내버려 두지 않는 예수의 모습인 거지.(203쪽)


마르코 복음서는 수난이 무서워 도망쳤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와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에 대해 전해 주고 있지는 않아. 다만 다른 복음서나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따라가 보면 또 하나의 푸른 물고기가 되어 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어. 예수처럼 수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그들을 보게 되지. 그들은 눈뜨는 고된 시간과 아픈 과정을 겪고 나서야 예수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게 된 거야.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목숨을 다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보았을 테고, 그 사랑이 빛이 되고 부활이 되는 것을 보았을 거야.(248쪽)


대구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매일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구대교구 만촌1동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이창영 바오로 신부의 묵상집. 복음 말씀을 일상 사건이나 우화와 연결 지어 알기 쉽게 풀이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한 사제의 묵상과 성찰을 마주하며, ‘강론 아닌 강론’, 곧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되 깊이를 잃지 않은 강론을 접할 것이다.

이 짧은 글들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그 사랑을 떠나도
그 사랑은 나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사제 이창영 바오로는 로마 라테라노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쳤으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매일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대구대교구에 있는 한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곧,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약속의 땅으로 길을 떠난 아브라함(히브 11,8)처럼 그저 부르시는 곳으로 떠났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처럼 그저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다.


  이 책은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이 길 위에서 저자가 묵상한 바를 한데 엮은 것이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가볍게 썼던 글 중에서 쉰네 편을 가려서 뽑았다. 그래서 제목이 ‘그것마저 놓아라’이며, 부제는 ‘허물 많은 한 사제의 일상 묵상’이다. 저자는 윤리신학에 천착했던 교수답게 무엇이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바른 길인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한편, 본당신부답게 복음 말씀을 일상 사건이나 우화와 연결 지어 알기 쉽게 풀이한다.


  “그것마저 버려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장 소중한 것마저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 손짓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진실한 믿음으로 다가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살려 주시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시겠다 하십니다. … 의심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불필요한 것,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다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한 사제의 묵상과 성찰을 마주하며, ‘강론 아닌 강론’, 곧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되 깊이를 잃지 않은 강론을 접할 것이다. 이 짧은 글들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가 앞에 없을지라도 등 뒤에는 나를 노심초사 걱정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나는 그 사랑을 떠나도 그 사랑은 나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책 속에서>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 정도로 안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적당한 정도, 남들이 하는 정도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22,34-40). 죽음을 무릅쓰고 마음과 정신을 전부 쏟아부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최선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고통이 없는 한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아프지 않고 돈이 축나지도 않는 사랑, 고통을 느끼지 않고 손해를 보지도 않는 사랑을 하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랑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마음 아픈 사랑’, ‘고통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 자신의 귀중한 것을 내놓는 아픔과 고통이 있을 때 그 사랑이 더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28-29쪽)


만일 일부 사람에게 재화가 편중되어 빈부 격차가 극심해진다면 다른 많은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개인의 ‘사유재산권’은 정당성을 잃습니다. ‘사유재산권’은 ‘만인의 재산사용권’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내 것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340?~397)는 말했습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그들의 몫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다.”
  가톨릭교회는 넉넉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사랑의 의무가 아닌 정의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남을 돕는다는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가 요구하는 의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52쪽)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까지 용서해 주시는데 무엇이 고통스럽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이나 나약함에 대해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수와 과오에 대해 그저 비관만 하는 게 아니라, 용기 내서 다시 일어서는 자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야 합니다.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망에 빠져 좌절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망에 빠져 포기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을 반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써 성실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187-188쪽)






차례 


삶과 죽음 / 유비무환 / 인간 낚시 대회 / Thank you, Thank so much! / 사랑의 온도 /

제발 밥값 좀 해라! / 그것마저 놓아라! 그것마저 버려라 /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

사랑은 닮는 것 / 성탄의 신비 / 성가정이 되는 비결 / 세례의 의미 /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 내가 누군지 알아? / 사유재산권과 만인의 재산사용권 /

내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 조건 없는 사랑 / 악마 대학 / 사랑에는 사랑으로 /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성소(聖召) / 청개구리 /

미친 사람 / 십자성호 / 생명의 음식 / 대접 / 이태석 신부님의 외침 / “얼른 내려오너라!” /

악마의 도끼 세 자루 / 나이 드신 어머니를 팝니다! / 성경의 세 가지 물음 /

마음의 눈, 믿음의 눈 / 정도(正道) / 베드로 사도 / 포도나무와 가지 /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겸손한 어머니 / 제 탓이오! / 말의 힘 /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 /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 신앙적 판단과 선택 / 다름과 틀림 /

내가 가진 것은 나만의 것인가? / 성인 되기 참 쉽다 / 손님은 왕이다! / 먼저 내 마음을 바꾸면 /

우리의 왕 / 기도할 때 분심이 드십니까? / 제발 부활의 증인답게 살아다오! / 열등감 / 새로운 아침


지은이: 이창영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라노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매일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구대교구 만촌1동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