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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빌렘 서한’ 중 안중근 관련 자료만 선별

프랑스어 판독, 번역, 주석… 올해 순국 110주년 맞아 완간

 

 

 

■ 100년 전 한 프랑스 선교사가 남긴 편지들

◯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2020년 안중근 토마스 순국 110주년을 맞아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 빌렘 신부의 친필 서한을 판독·번역한 (안중근 순국 110주년 기념 빌렘 신부 서한집) 빌렘 신부, 안중근을 기록하다』를 발간하였습니다.

◯ 빌렘 신부가 황해도 지역 사목을 담당한 1896년부터 1914년까지 쓴 편지 중에서 안중근 가문과 관련된 26통을 판독 및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달았으며, 다양한 사진 자료와 연보, 가계도 등의 부록을 수록하였습니다.

◯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뮈텔 문서」 가운데 ‘빌렘 신부 서한’으로 분류된 것은 총 281건입니다. 이 가운데 안중근 가문과 관련된 서한을 선별한 뒤,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중에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관련된 서한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포함시켜, 지난 2015년 3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본 연구소 소식지 월간 『교회와 역사』에 연재한 바 있습니다. 

책 속으로 

청년 안중근

◯ P. 137-138 안태훈 베드로의 아들인 안 토마스(20세, 기혼)는 저에게 충실합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신앙을 해치지 않으면서 장래를 좀 준비하고자 합니다. … 현재 그의 태도는 매우 모범적입니다. 하지만 솔깃한 유혹이 예기치 않게 찾아올 때,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 열렬히 좋아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좋지 않게 급변하는 일이 있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 그는 주교님의 조언을 명령처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뮈텔 문서 1899-237] 1899년 9월 26일 자 서한

하얼빈 소식을 듣다

◯ P. 202-204 다음 주일날 저는 어떤 이름도 대지 않고, 장백의에 영대를 걸치고서 성수 예절을 마친 후 천천히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그러고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다섯 번째 계명을 강조하였습니다. … 그러나 애국자들(…)은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 ‘유럽인일 뿐이네’, ‘애국심이 없네’ 하는 비난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난의 말이 평소 유순하고 정말로 충실한 제 신자들 여럿에게서 나왔습니다. 저는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옳았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아팠고 하나도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 P. 207-208 토마스가 천주교인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간수들로부터 이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크게 성호를 그었습니다. … 멀리 있는 여러분(로렌 지방의 후원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리석게 보일 테지요. 하지만 그가 환상을 품었던 것을 이해하려면 한국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믿는 바대로 한 것입니다. 나중에 뤼순 감옥에서 그는 한국 북쪽 지방에서 일본인들과 3년 동안 ‘유격전’을 치르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저에게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 그 기간 내내 그는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고 (그는 한국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아침·저녁 기도와 묵주기도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쳤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심이 감옥에 가서야 되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P. 209-210 3월 8일에 토마스의 형제인 (안정근) 치릴로, (안공근) 요한과 함께 감옥으로 갔습니다. … 저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작정이었습니다만 본능적으로 솔직함이 능란함을 앞섰습니다. 두 명의 간수와 함께 토마스가 방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한국식으로 내게 큰절을 하자 저는 그의 손을 잡고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가엾은 토마스, 자네를 여기서 만나다니!”-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51] 1912년 3월 19일 자 서한

P. 214 저는 중백의를 걸치고 머리에 사제 각모를 쓰고 두 손에 십자가를 들고 맨 뒤에서 걸었습니다. 감옥에서 이런 행렬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넓은 응접실에 들어가자 두 명의 간수 사이에서 토마스가 가느다란 수갑을 찬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탁자에 공손히 십자가를 내려놓고, 수감자에게 혼자 와서 제 곁에 무릎을 꿇으라는 표시를 했습니다. … 우리는 마치 어느 오래된 대성당의 한구석에 있는 것처럼 자유로웠습니다. 저와 제 고해자는 우리를 둘러싼 이들을 경계하지 않고 깊이 몰입했습니다.

◯ P. 217 토마스는 5년 동안 미사 참례를 못 했어도 응답문을 한 구절도 잊지 않았습니다. … 지상의 모든 생각은 저 멀리 두었습니다. 굉장한 미사였습니다! 벅찬 감격 속에서 얼마나 몰입했던지요! 저는 이 미사를 잊지 않았고, 또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P. 217 40인의 순교자 축일인 3월 10일이었습니다. 미사는 천천히 거행되었습니다. … 가련한 토마스가 이 성스럽고 거룩한 분위기에 되도록 오랫동안 젖어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성토요일 안 토마스 순국

◯ P. 220 토마스는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하신 예수님의 공덕에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성금요일이었던 3월 25일을 처형일로 요청했었습니다. 저는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성금요일에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이 마지막으로 형을 면회했습니다. (저는 12일에 다시 뤼순을 떠나왔는데 토마스의 모친에게 아들의 마지막 인사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제들이 제게 전하길 토마스는 기쁘고 선하고 밝은 모습이었으며, 그에게서 그렇게 깊은 존경심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 P. 220-221 제가 청계동에서 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님이 부르는 부활 찬송 「복된 탓이여[Felix culpa]」를 들으며 눈물을 삼키고 있던 때에 토마스는 처형장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겠다고 요청했고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나서 결연히 일어나 스스로 교수대로 가서 섰습니다. “대한 만세”를 외친 후 그는 순순히 밧줄의 매듭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일본 신문들을 통해서야 이 상세한 마지막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이 내용은 고인의 성격에 딱 맞는 것들입니다.

◯ P. 221 다음 날, 부활 대축일 미사와 알렐루야를 바치고 난 후 축일을 위해 사방에서 모인 신자들이 환희에 차 있는 가운데, 기다렸던 것이긴 하지만 끔찍한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었음”. 환희에 찬 떨림의 온기를 여전히 품고 있던 종이 이번에는 천천히 조종弔鐘을 울렸고, 신자들은 흐느끼며 경당에 모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여러분(로렌 지방의 후원자들)의 기도 중에 제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했던 이 영혼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51] 1912년 3월 19일 자 서한

빌렘 신부, 프랑스로 돌아가다

◯ P. 177 제가 어느 사형수에게 목자의 의무를 이행하러 갔다는 이유로 주교님께서 내리신 60일간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에 대해 저는 작년 보고서에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다시 거론하기 위해서는 오직 시간이 흘러야만 얻을 수 있는 평정심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뮈텔 문서] 1910~1911년 연례 보고서

◯ P. 257 “단 한 번이라도 평화로워지고 싶습니다.”

경의를 표하며 신부님의 충실한 동료

조제프 빌렘

-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51] 1914년 2월 12일, 서울 대목구장 직무대행 두세 신부에게 보낸 서신

목차 | 안중근 순국 110주년 기념 빌렘 신부 서한집

빌렘 신부, 안중근을 기록하다

 

 

간행사

추천사

일러두기

해제

 

 

◆ 한글 번역문

서한 01 | 1896년 12월 6일 | 안태훈의 공소 설립 청원

서한 02 | 1897년 1월 12일 | 청계동 공소 설립

서한 03 | 1897년 1월 27일 | 청계동에서의 개종 운동

서한 04 | 1897년 2월 4일 | 청계동 사건•1

서한 05 | 1897년 2월 14일 | 청계동 사건•2

서한 06 | 1897년 6월 1일1896~1897년 연례 보고서 | 안태진의 모친 영세 반대

서한 07 | 1898년 2월 22일 | 해주 관찰사의 안태훈 형제 탄압

서한 08 | 1898년 3월 3일 | 체포된 안태진

서한 09 | 1898년 5월 8일1897~1898년 연례 보고서 | 안태훈 가문의 여성 신자들

서한 10 | 1899년 2월 4일 | 빌렘 신부의 ‘외무부 장관’ 안태훈

서한 11 | 1899년 9월 26일 | 안중근의 장래에 대한 논의

서한 12 | 1900년 3월 12일 | 옹진 사건

서한 13 | 1902년 3월 3일 | 투옥된 안태훈

서한 14 | 1902년 3월 21일 | 안태훈 석방

서한 15 | 1904년 12월 22일 | 안태훈 모친(고 안나)의 사망

서한 16 | 1905년 11월 24일 | 안태훈 형제의 갈등

서한 17 | 1906년 1월 10일 | 안태훈 베드로의 사망

서한 18 | 1906년 2월 23일 | 상하이로 떠난 안중근

서한 19 | 1911년 5월 17일1910~1911년 연례 보고서 | 빌렘 신부의 성무 집행 정지에 대한 반박

서한 20 | 1912년 3월 19일 | 빌렘 신부의 안중근 면회

서한 21 | 1912년 8월 27일1911~1912년 연례 보고서 | 투옥된 안명근

서한 22 | 1912년 12월 25일 | 안중근 의거 후의 안중근 가문

서한 23 | 1913년 6월 6일 |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의 불화

서한 24 | 1913년 6월 6일1912~1913년 연례 보고서 | 청계동을 떠난 빌렘 신부

서한 25 | 1914년 2월 12일 | 빌렘 신부의 성무 정지의 부당함 호소

서한 26 | 1914년 2월 12일 | 빌렘 신부의 프랑스 휴가 요청

 

 

◆ 프랑스어 판독문

01 | 뮈텔 문서 1896-132 | le 6 décembre 1896, Ma-ryem

02 | 뮈텔 문서 1897-6 | le 12 janvier 1897, Tchyeng-kyei-tong

03 | 뮈텔 문서 1897-233 | le 27 janvier 1897, Ma-ryem

04 | 뮈텔 문서 1897-230 | le 4 février 1897, Ma-ryem

05 | 뮈텔 문서 1897-231 | le 14 février 1897, Ma-ryem

06 | 뮈텔 문서 | le 1er juin 1897, Ma-ryem(Compte rendu pour 1896-1897)

07 | 뮈텔 문서 1898-206 | le 22 février 1898, Mai-hoa-tong

08 | 뮈텔 문서 1898-207 | le 3 mars 1898, Kom-pa-eui

09 | 뮈텔 문서 1898-200 | le 8 mai 1898, Tchyeng-kyei-tong(Compte rendu pour 1897-1898)

10 | 뮈텔 문서 1899-102 | le 4 février 1899, Tchyeng-kyei-tong

11 | 뮈텔 문서 1899-237 | le 26 septembre 1899, Tchyeng-kyei-tong

12 | 뮈텔 문서 1900-71 | le 12 mars 1900, Tong-pou, Sin-tchyen

13 | 뮈텔 문서 1902-42 | le 3 mars 1902, Hai-tjyou

14 | 뮈텔 문서 1902-51 | le 21 mars 1902, Syep-pat-Kol

15 | 뮈텔 문서 1904-203 | le 22 décembre 1904, Tchyeng-kyei-tong

16 | 뮈텔 문서 1905-146 | le 24 novembre 1905, Tchyeng-kyei-tong

17 | 뮈텔 문서 1906-34 | le 10 janvier 1906, Tchyeng-kyei-tong

18 | 뮈텔 문서 1906-66 | le 23 février 1906, Ham-tjyem-mol

19 | 뮈텔 문서 | le 17 mai 1911, Sin-tchyen(Compte rendu pour 1910-1911)

20 |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 51 | le 19 mars 1912, Tchyeng-kyei-tong

21 | 뮈텔 문서 | le 27 août 1912, Tchyeng-kyei-tong(Compte rendu pour 1911-1912)

22 | 뮈텔 문서 | le 25 décembre 1912, Hai-tjyou

23 | 뮈텔 문서 | le 6 juin 1913, Hai-tjyou

24 | 뮈텔 문서 | le 6 juin 1913, Hai-tjyou(Compte rendu pour 1912-1913)

25 |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 51 | le 12 février 1914, Hai-tjyou

26 | 파리 외방전교회 문서 H 51 | le 12 février 1914, Hai-tjyou

 

◆ 부록

연보

참고문헌

색인


 저자 소개 | 빌렘 신부(Wilhelm, Nicolas Joseph Marie, 1860~1938)


빌렘 신부는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로렌주 모젤 지방의 스피슈렌(Spicheren)에서 태어났다. 1883년 2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3월 28일부터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신학교에서 5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하였다. 1888년 조선교구로 배속되어 이듬해 2월 한국에 입국하였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제3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 1896년 황해도 지역 전담 사제로 결정됨에 따라 매화동(玫花洞) 본당과 청계동(淸溪洞) 본당 초대 주임을 차례로 맡으며 성당을 건립하였고, 진남포(鎭南浦)에도 성당 대지를 마련하는 등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 청계동에서 세례성사로 인연을 맺은 안중근(安重根) 토마스가 이토 히로부미 포살로 투옥되자, 뮈텔 주교의 불허에도 뤼순 형무소를 찾아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이 때문에 1910년 3월 15일부터 60일간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고, 뮈텔 주교와의 불화로 1914년 4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 이후 고향 알자스(Alsace)에서 사목하면서도 한국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은 버리지 않았으며, 1919년 베르사유 협상이 진행될 당시 파리를 방문한 한국 측 대표를 도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38년 5월 16일 모젤(Moselle) 지방의 사랄브(Sarralbe) 요양소에서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