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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도서는 <예수님 수난 15기도>는 1년 동안 매일 바쳐야 하고,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는 12년 동안 매일 바쳐야 합니다.





  

스웨덴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아버지에게서 유복하게 태어난 비르짓다(1303-1373)는 9살 때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강론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십자가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못박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보라! 내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심한 상처를 받았는지!"
"오, 주님! 누가 주님을 이렇게 못박았습니까?"
"나를 멸시하고 내 사랑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 한 짓이란다."
비르짓다는 14세에 귀족청년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고 부부가 모두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 열심히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였다. 1344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비르짓다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세상을 떠나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극기의 생활로 기도하며 관상생활을 하였다. 그때 첫 번째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들 중에 소위 "비르짓다의 약속"이 들어 있다.

이 책 안에는 성녀 비르짓다가 "만일 네가 이 매맞는 고통과 상처를 공경하고자 한다면, 매일 주님의 기도 15번과 성모송 15번을 바치며 이 15기도를 1년 동안 바쳐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주겠다."하신 예수님께서 성녀 비르짓다를 통하여 계시하신 당신 수난에 대한 15기도와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가 있으며, 성 알퐁소 리구오리의 "십자가의 길"과 "성서에 의한 십자가의 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전례적인 기도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다.


예수님 수난 15기도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



옮긴이 : 하 안토니오 몬시뇰

1922년 10월 14일 독일 남부 베르팅겐에서 출생.
1933년 3월 독일 딜링겐 김나지움 입학.
1941년 8월 군대 입대, 통신병으로 복무중 존전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 억류, 전쟁 포로생활(1945년 5월-1948년 12월) 1949년 3월 독일 딜링겐 신학대학에서 수학.
1951년 2월 재학중 성 마리 그리뇽 드 몽폴의 저서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께 완전한 봉헌>을 읽고 영향 받다. 1953년 신학대학 졸업 후 베르팅겐 직업학교에서 5년간 교사로 재직,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다. 이때 만난 선교사 신부로부터 한국에 대한 이야
기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다. 1958년 4월 27일 사제 서품. 1958년 7월 5일 일본 화물선 편으로 한국에 오다. 1959년 10월 7일 부산 동항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
1964년 8월 15일 푸른군대 한국본부 창설. 1964년 피정, 교육을 위한 <사랑의 집> 건립. 1965년 1월 18일 교회 일치운동 시작. 1965년 3월 한독 여자실업학교 설립. 1968년 10월 7일 푸른군대 국제 지부장 회의 참석. 한국 푸른군대 활동상황을 세계에 소개. 1974년 5월 19일 제1회 자유의 다리에서 교황대사, 성직자, 수도자, 신자 12,000여명 평화통일 기원 미사 추진. 1977년 2월 20일 교회 조산원 시작(후에 교회의원이 되다) 1978년 자유의 다리 임진각 광장에서 해마다 남북통일 염원기도 대행사 개최.

1979년 2월 동항 본당 주임 사임. 1983년 5월 사제서품 25주년, 회갑. 1983년 7월 남북통일 염원기도회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성지 순례단 인솔 행사 참석. 1984년 푸른군대 지도 신부로 전국 360여 본당 방문 강론, 피정지도, 신심행사 및 기도회를 이끌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 그외 신심 잡지 <마리아>(계간)발간,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완전한 봉헌> 1,2 외 다수의 신심서적 번역 출간. 1986년 8월 18일 제1회 전국 지도신부 회의 주관. 1986년 10월 12일 푸른군대 국제 본부 평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