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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봄을 믿어봐”

마음으로 응시하는 직관의 세계
여백 사이를 채운 견고하고 명징한 기도

올해로 시력(詩歷) 53년째를 맞이한 ‘시선視線의 시인’ 김형영의 열번째 시집 『화살시편』이 출간되었다. 『땅을 여는 꽃들』(2014) 이후 5년에 걸쳐 쓴 시 가운데 71편을 묶어낸 이번 시집에서 김형영은, 독자적인 시 세계의 원형을 재확인하고 직관을 통해 간결하게 함축된 성서적 시어로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관능적이고 동물적인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초기 시들에서부터, 일상을 살피며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최근의 종교적/성찰적/자성적인 시들에 이르기까지, 지난 50여 년간 김형영의 시는 다양한 시적 변화를 거쳐왔다. 그러나 “배운 말 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말을 바치는”[『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1979) 뒤표지 글] 행위가 곧 시를 쓰는 일임을 정직하게 믿어온 시인의 굳은 의지만은 언제나 한결같다. “보이는 것 중에서 가장 신성한/이제 막 태어나는 아가말” 같은 가장 순수한 말. 시인은 말한다. “좋은 시인의 시도/태어난 지 세이레쯤 된/아기 옹알이 같은/눈에 보이는 음악이어라”(「시」). 

시인은 시작 50여 년의 지점에서 창작의 원형을 재확인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신인처럼 길을 걷고자 한다. 김형영의 시 창조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은 성서적 상상력과 직관의 힘이다. 그는 성서 문장의 표현과 울림에 매력을 느끼고 그 파장을 활용하여 자신의 삶의 태도를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대상과의 접촉에서 시적 의미를 발견하는 역동적 장치인 직관의 힘으로 성서적 상상력을 발동케 하고 그 진폭을 조절한다. 그리하여 대상과 상황과 언어에 대한 고도의 직관적 인식이 압축적으로 가동할 때, 단순성의 미학으로 인간 정신의 평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한 편의 시, ‘화살시편’이 탄생하는 것이다._이숭원(문학평론가) 

도래할 ‘그 시간’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일

50년을 파먹었는데
아직도 허기가 진다
―「시를 쓴다는 것」 부분

시인은 자신의 시를 “미완성 진행형”이라 일컫는다. 시란 50여 년간 “쓰고 고치고, 또 고쳤는데도” 여전히 완성되지 않는다(「시인의 말」). 시집 맨 처음 독자를 맞이하는 「서시」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빌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조개껍데기로 온 세상 바닷물을 모조리 퍼 담으려는 아이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불가능을 향해 끊임없이 매진해온 50여 년간의 도전기가 켜켜이 누적된 김형영의 시는 『화살시편』에서 그 세월을 간결한 문장으로 응축하여 의미의 정수에 가닿는다. 
실존에 대한 질문이 담긴 시 20편으로 구성된 시집 1부 ‘그 시간’에서는 노년을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겸허한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지난 2014년 작고한 故 김치수 평론가(「하늘 위」)나, 故 임영조 시인(「부치지 못한 편지」), 故 이청준 소설가(「신화가 된 진목리 당산나무」) 등 먼저 간 문우들을 그리는 시가 눈길을 끈다. 한편, 시인이 수십 년간 몸담아온 ‘칠십년대’ 동인을 위한 시들도 수록돼 있다. 먼저 떠난 벗이든 함께 살아가는 벗이든, 시인이 그들에게 건네는 편지 같은 시는 담담하고 따뜻하다. “우리는 어느새 늙어/한자리에 모여 앉아 마냥 즐거웠다”(「꿈이기에」). 

2부 ‘지금 피는 꽃은’에서 시인은 일상적인 풍경에 주목한다. 다만 나무, 꽃, 새 같은 작은 존재와 한 몸이 되어 느끼는 영적 교감의 기쁨을 시로 전달하는 특유의 방식에 더하여, 일상을 해치는 현실에 대해 비판 섞인 목소리로 우려하기도 한다. “날씨도 믿을 수 없고/이웃도 믿을 수 없다.//[……]//보이는 땅도 바다도 믿을 수 없고/안 보이는 시간도 믿을 수 없다.//이제 무얼 믿고 살아야 하나.”(「수평선 / 8」)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할지 암담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이 엄습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빠진 것만 같고 내일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사람은 오늘의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염려 끝에 시인이 내놓은 맺음말은 마치 기도하듯이 낙관에 기울어 있다. “그래도 봄을 믿어봐”.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그래도 봄을 믿어봐」 전문

‘화살시편’, 여백으로 올리는 기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 순간적으로 짧게 올리는 기도를 ‘화살기도’라고 한다. 3부 ‘화살시편’은 그 기도의 이름을 땄다. 저마다 다른 부제가 달린 29편의 시는 대개 서너 행으로 이루어진 단시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그에 따르면 김형영은 대상을 오래도록 관찰한 뒤 상황과 언어에 대해 고도의 직관적 인식을 행한다. 그렇게 결합된 사유와 상상력이 짧은 시행으로 압축되고, 마침내 한 편의 ‘화살시편’이 탄생한다. 때문에 이 간결한 시들에는 묵직한 성찰이 스며 있다. 모든 것이 점차 복잡해지는 이때에, 김형영은 단순성의 미학에 눈을 돌려 견고한 시로써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봄, 김형영의 시에 기대어 단순하고 맑은 진리 하나씩 발견해보길 권한다.


본문중에서~~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것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 『마태오 복음서』 27장 47절 중에서)

하루살이 한 마리가 방에 날아들었다.
오후 3시에,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 작은 날개로……

유리창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데
무심한 내 손은 눈 깜짝 사이
그의 전 생애를 앗아버렸다.

누가 그의 죽음을 바랐던가.
창밖으로 쫓아낼 수도 있었다.
그의 남은 몇 시간의 삶을
즐기도록 기다려줄 수도 있었다.

전 생애라야 하루뿐인데
틈을 내어 찾아온 손님,
그의 사는 참모습과 만날 기회를
순식간에 지우고 나는 낮잠에 들었다.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그의 영혼
나의 영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의 영혼의 무게
초신성만 할지 모르는데,
그의 영혼의 눈
태평양만큼 눈물이 고여 있을지 모르는데,
그의 영혼의 가슴
은하수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데,

내 꿈과 같은 꿈을
그도 꾸고 있을지 모르는데.
(/ 「오후 3시에」 중에서)

아직도 모르겠다
태어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 「화살시편 21―모르겠다」 중에서)

진달래 꽃눈 맞추며
산에 오르다 둘러보니

봄날이 벌써 앞서가더라
(/ 「화살시편 26―봄날」 중에서)

뒤표지 글(시인의 글)
정말 못 당하겠네
밤을 낮이라 하고
낮을 밤이라 우기는 놈들

올빼미 너냐?
아니면
너 말고

누구냐?

나냐?
(/ 「올빼미」 중에서)

내 시는 모두 미완성의 완성이다.
쓰고 고치고, 또 고쳤는데도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 진행형이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을 온전히 떠나’
세상과 만나는 시간이 오면
허공에 매달린 홍시 하나로도
하늘의 종을 칠 수 있을 것 같다.

2019년 봄을 열며
김형영
(/ '시인의 말' 중에서)


1부 그 시간
서시 
낯선 곳 
건들대봐 
큰일이다, 아 
그 시간 
제4과 
다 달랐다 
꿈이기에 
시 
조선백자달항아리 
시를 쓴다는 것 
끊어진 생각 
하늘 위 
그럼에도 
부치지 못한 편지 
오후 3시에 
소작인의 슬픔 
호號 이야기 
꿈을 현실로 
다리 없는 꿈길 
고래의 노래로 사랑의 등불을 켜다오 
돌아가자 
하늘의 문을 땅에서 열다 
신화가 된 진목리 당산나무 
한 번 더 
내가 죽거든
모른다고 하네 
반구대암각화의 고래들 

2부 지금 피는 꽃은
지금 피는 꽃은 
우리의 꿈 
제멋에 취해 
그래도 봄을 믿어봐 
꽃아, 
뜸부기 
무슨 말을 들었기에 
석양 
채석강 
수평선·8 
수평선·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