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을 철 지난 이데올로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이 일으킨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참된 종교성은 시대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해방적 실천을 요구한다고 보겠다.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 신학이다. 비판적 연구는 늘 모순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비판 신학은 모순을 일으키는 기존의 해석을 발견하고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해석을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모순은 흔히 차별이나 불의한 상황 때문에 발생하기에 비판 신학은 해방신학과 맥을 같이한다.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활동했던 여성 지식인들의 삶을 간결하게 그려낸 본서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잊힌 주체적 여성들을 소환하여 오늘의 맥락을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사회적 불평등은 신학적 문제다
-여성주의 신학의 간략한 역사
본서의 원제는 ‘역사 속 여성주의 신학’이다. 저자는 여성신학과 여성주의 신학을 구분하는데, 여기서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나 있다. 기본적 문제의식은, 역사 안에 뛰어난 여성 지성인들이 많았고 학문적 · 실천적으로 탁월한 기여를 했는데도, 왜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고 묻어 버리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본서에 따르면, 여성주의 신학이나 여성주의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차별적이고 부당한 ‘모순을 경험’(발견)해야 한다. 둘째, 바꾸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물려받은 해석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개인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셋째, 소속 공동체가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제도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기준에 따라서 남성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나 불자인 비구니 말산요연(末山了然)까지도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범주에 넣는다. 이들 외에도 여성주의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주체적 여성들의 삶이 생동적으로 전개된다.
여성주의 신학의 의미와 연원을 다루고 근대 초기의 여성 논쟁과 근대의 탄생을 탐색한 다음 여러 여성주의 신학자들을 소개하는 본서의 바탕에는 ‘사회적 불평등은 신학적 문제’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본서가 소개하는 여러 ‘신학자들’은 우리 사회에 낯선 인물들이며 일부를 제외하곤 여성학계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독자들은 이런 선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여러 인물을 소개하면서 현재와 연결 짓고, 여성주의 신학의 핵심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고민이 작은 책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판 스휘르만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철학자요 신학자이며 17세기의 가장 지적인 여성으로 꼽히는 “네델란드의 미네르바” 판 스휘르만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리 드 구르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한계”라는 표현을 썼다. 이 말은 궁극적 기준이 하느님이지 인간의 관습이나 편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판 스휘르만은 병든 고모 둘을 20년 이상 돌보아야 하는 현실적 한계를 겪으면서 이 말을 했다. 삶의 노고와 한계를 인식하고 수용했던 천재적 지성인이면서도 “하늘” 이외에 궁극적 기준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아버지(의 뜻)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했던 예수의 실천과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주체적으로 찾아 나섰고 의식했고 그에 따라 살아갔다는 점에서, 자기 성소에 충실하면서도 당시대성을 초월한 인물이었다. 그가 삶의 모토로 삼은 문장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혼의 진정한 위대함으로 이끄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여성에게 적합하다.”
판 스휘르만 외에도 여러 매력적인 인물을 간결하게 소개하는 본서는 짧은 분량으로 서구 여성주의 신학의 핵심 역사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여성주의 신학 이후의 여성신학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도 한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물론이고, 사회적 불평등 개선에 관심을 둔 일반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끄는 글
1 여성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2 가부장적 신학과 여성주의 신학
3 여성 논쟁과 근대의 탄생
4 유럽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
5 카탈루냐 최초의 여성주의 신학자
6 근대성과 마녀사냥
7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그녀의 학교
8 성모 마리아에 대한 주체적 해석
9 교회 검열에 대한 투쟁
10 17세기 여성 문학 활동의 절정
11 여성과 남성의 평등성
12 그리스도교 직무에서의 여성-남성 평등
13 여성들의 지적 활동
14 유럽 최초의 여성 박사들
15 마지막 성찰
주
참고문헌
글쓴이 :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Teresa Forcades i Vila
스페인 몬세라트 베네딕도회(Sant Benet de Montserrat) 수녀. 1966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공중보건학 박사(바르셀로나 대학교), 신학 박사(카탈루냐 신학대학교), 내과 전문의(뉴욕 주립대학교)이자 사목학 석사(하버드 대학교)이다. 공중보건학 박사의 논문 주제는 대체 의학이고 신학 박사의 논문 주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다. 저서로는 『삼위일체, 오늘』La Trinitat, avui(2005), 『대규모 제약회사의 범죄』Los crimenes de las grandes companias farmaceuticas(2006),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La Teologia feminista en la historia(2007)―원래 카탈루냐어로 쓰인 이 책의 카스티야어 판본이 본서이다―이 있다. 2009년에 감기에 대한 대규모 예방 접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옮긴이 : 김항섭
전남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브라질 상파울루 가톨릭대학교와 상파울루 감리교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이다. 『생태학의 도전과 그리스도교』 『신자유주의 시대 라틴아메리카 시민사회의 대응과 문화 변동』(공저)을 쓰고, 『인정 없는 경제와 하느님』 『생태신학』 『물신』 『종교사회학: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신들의 전쟁: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정치』 등을 옮겨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