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길은 끝이 없으며 언제나 새로운 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뵙는 길,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길은 그분에 대한 갈망으로 새로 태어나고, 사랑에 대한 갈망에서 진보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2015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바오로딸’에서 펴내는 월간 성서 잡지 <야곱의 우물>에 연재했던 ‘교부들과 함께 성경 읽기’를 한데 묶은 것입니다. 교회가 자리를 잡아 가던 시기에 교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니다. 연재물들을 한데 묶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니 그 목적을 이루기에는 제 힘이 턱없이 부족했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짧으나마 교부들의 작품을 실제 대하고 그분들을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많은 교부들 가운데 특히 이름이 알려진 분들을 중심으로 고통, 말씀 읽기, 기도, 이웃 사랑, 깨어 있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등 오늘의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주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읽다 보면 교부들이 천 년도 더 된 옛사람들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고통을 겪고 고민을 하며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길을 찾던 분들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글의 말미에서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오늘의 현실을 연관 짓는 질문들을 던져 보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버지로부터 떠나왔다가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요한 13,3 참조)이라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1981년) 선생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하게 사는 삶이 우리 신앙생활의 본령이라 한다면 교부들, 곧 교회의 아버지들을 깊이 만나는 일은 우리가 아버지께 가는 길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 작은 책을 통하여 교부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되고, 교부들을 더 사랑하게 되기를 빌어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대로 앎은 사랑으로 이끌고 사랑은 다시 더 깊은 앎으로 이끌어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는 말 가운데서)
■■ 책 속 한 구절
예수님의 싸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짐으로써 이기고 죽음으로써 사는 싸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싸움 방식, 사랑의 방식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다른 것을 자기 집의 기초로 놓는 일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가치, 권력, 부를 추종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죄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뱀은 쾌락이고 하와는 감각이며 아담은 이성을 뜻한다고 풉니다. 원죄란 쾌락이 감각을 유혹할 때 감각은 다시 이성을 부추겨 결국 사람이 죄에 떨어지는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평화를 선포하는 이는 언제나 싸움 가운데 있게 됩니다. 평화가 필요한 곳에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봅니다. 이웃을, 함께 살아갈 형제자매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이겨야 하는 적으로 보게 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배운다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완전하게 사랑하기 전에는 어떠한 선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진리와 사랑이 별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앎이라면 교만은 무지이기도 합니다.
헥사메론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이 믿음, 곧 하느님을 알아보는 데 있다고 합니다.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대바실리오
2장 대그레고리오
3장 아우구스티노
4장 예로니모
5장 암브로시오
6장 고백자 막시모
7장 요한 크리소스토모
8장 니사의 그레고리오
9장 테르툴리아노
10장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나가는 말_아버지들의 길
글쓴이 : 황인수
성바오로수도회 수사이며, 로마에서 교부학을 공부했다. 저서로 「작은 사람아, 작은 사람아」, 「깨어나는 기도」(공저)와 번역서 「파스카」등이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ㅣ 이정훈 기자 ㅣ 2017년 8월 13일
교부들의 문헌을 읽은 적이 있는지.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교부(敎父)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널리 전파한 존경받는 위대한 사상가를 일컫는 칭호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중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의 토대를 확립한 많은 교부들의 문헌은 여전히 ‘신자들이 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교부들과의 친밀도’가 한껏 높아진다.
황인수(성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신부가 펴낸 「끝없는 길 언제나 새로운 길」(성바오로출판사/1만 3000원)은 사도 시대부터 수 세기에 걸쳐 정통 신앙을 수호한 교부 10명의 빛나는 문헌과 감동적인 삶을 독자 눈높이에 맞춰 엮었다. ‘기도’, ‘이웃 사랑’, ‘깨어 있음’, ‘말씀’ 등 가장 필요한 주제들을 다뤘다.
황 신부는 “교부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삶으로 주석해낸 성인들”이라며 “교부들의 말은 당대 현실 문제와 직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닌다”고 강조했다.
책 주인공은 대바실리오(329~379)부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에 이른다. 교부들은 평생을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깊이 깨닫는 데 매진했고, 말씀의 의미를 주해해 설교했다. 또 부패한 황실, 부유해진 권력과 잘못된 세태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황 신부는 “오늘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신앙적으로 현실을 짚고, 이웃사랑과 실천을 강조하시듯 교부들 또한 개인 영성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회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목숨까지 내놓았다”고 했다.
실제 부패한 권력층을 향해 “소유물이 소유자의 것이 되어야지 소유자가 소유물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외쳤던 암브로시오 성인은 결국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유배지에서 순교했다. ‘황금의 입’(金口)으로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또한 폭군을 질타하다 쫓겨나 순교한다. 대바실리오도 추종을 강요한 황제에 당당히 맞섰다. 황 신부는 “교부들은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에 이 같은 모범과 실천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이분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을 제대로 알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꿰뚫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책은 교부들의 성경 주해서와 서간, 그리고 삶에 담긴 아름다운 신앙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 대바실리오는 “지상에서 천사들의 합창대를 모방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시편을 찬양했다.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 쓴 대그레고리오 교황은 지병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개인 기도’와 ‘이웃 섬기기’의 균형을 강조했다. 하느님 신비를 깊이 꿰뚫어본 ‘은총의 박사’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예로니모 성인이 갈라티아서의 해석을 놓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겸손한 논쟁’을 펼친 일화도 흥미롭다.
“모든 이를 돌보는 영혼의 의사이신 그분”(대바실리오),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영적인 재산을 분배하는 데도 불의할 것입니다”(예로니모), “그리스도를 마시십시오. 그분은 생명의 샘입니다”(암브로시오)와 같은 주옥같은 글귀도 읽을거리다.
로마 아우구스티니아눔에서 교부학을 전공한 황 신부는 “수원가톨릭대 신학생 시절, 스승의 날 신학생들이 교수님께 꽃을 달아드렸는데, 그분께서 글쎄 의자를 가져다 갑자기 칠판 위 예수님께 달아드리더라”며 “당시 교부학을 가르치셨던 이성효 주교님의 이 모습에서 ‘아, 이것이 참 신앙이구나!’를 느끼고 교부학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사실 교부란 꼭 이처럼 대단한 분들만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신앙을 전해준 모든 이는 교부입니다. 제게 세례를 준 신부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환 중에도 마지막까지 강론대 앞을 떠나지 않았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교부는 가까이 있습니다. 신앙을 전수하는 우리도 모두 교부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