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종소리’는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역사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황사영이 ‘백서’를 쓰게 된 배경과 그의 아들 경한, 그리고 정하상의 이야기가 담담히 ‘여수리’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황사영의 뜻이 이어진 정하상, 그리고 육신을 이어받은 황경한의 이야기는 두 줄기의 강물이 되어 때로는 격하게, 때때로 잠잠히 여울져 흐르다 멈추어 여수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넘나든다. 그 질곡의 회오리에 갇혀있는 여수리와 경한의 상처를 낫게 한 것은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었다. 그러나 차고 시린 사막의 밤은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져 조용히 잠들어 있는 누란왕국의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만큼 슬픈 바람의 노래를 지금도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 반역자’라고 단죄한 ‘황사영’인가?
작가는 2014년 8월의 124위 시복시성에서 황사영이 빠진 사실에 공허해 하며 작정하고 ‘고요한 종소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날의 검처럼 찬반론이 대립하는 백서의 정체성은 종교의 자유와 생명의 존엄성에 있다. 소설은 대박청래를 골자로 한 편지의 내용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권력을 정치적 보복에 악용한 지배계층의 명분 없는 환란을 먼저 꼬집고, 생명의 존귀함을 망각한 저들이 선량한 백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조선 교구에서 보관하고 있던 백서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에서 뮈텔 주교가 직접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달되었다. 황사영이 살아서 전하지 못한 백서는 그의 사후 125년 만에야 비로소 교황의 손에 쥐어졌다. 그렇지만 황사영은 그 편지로 인하여 2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반역자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복자품(福者品)에도 오르지 못 하고 있다. 황사영은 단지 일어난 일을 일어났다 말했고,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외쳤고, 힘이 약한 신자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황사영에게 돌을 던지려면 탐욕과 권위로 백성 위에 군림했던 조선 말기의 파행적이고 일그러진 정치 상황을 먼저 돌아보고, 저들의 편협하고 잔혹한 의식을 먼저 심판해야 한다. 백성을 저버린 저들이 권력을 업고 제 아무리 위풍당당한 명리를 내세운다 해도,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 자격이 없다. 백성을 먼저 저버린 것도 저들이고, 도덕과 윤리를 빙자하며 인간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한 것도 저들이다. 어떠한 정치적 명분도 생명의식을 저버리고서는 고귀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사람이 있어야 정치도 있고, 세상도 존재한다. 사람이 바로 세상 그것이니.
정말 황사영이 역적일까?
황사영은 백서와 함께 존재하며, 여전히 신앙의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복자로 추대되지 않았다고 그의 순교가 왜곡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진정한 화해가 요구되는 시점에서 잘못된 역사를 두고 여태 황사영만 단죄하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은 무엇인지. 진실이 왜곡되는 것보다 큰 오해가 없는데….”
[미리보기]
차례
외로운 난새
달빛을 밟고 온 사람
백서 일기 1
이십 년을 걸어온 만남
백서 일기 2
성 밖의 안개
백서 일기 3
거꾸로 비친 하늘
백서 일기 4
석양의 누
백서 일기 5
홀로 우는 북소리
백서 일기 6
누란의 왕녀는 모래 속에 잠들고
백서 일기 7
물을 찾아다니는 장미
백서 일기 8
구름이 끌고 온 천둥소리
백서 일기 9
작가의 말
글쓴이 : 장정옥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해무’가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고, 2008년 여성동아 제40회 장편 소설 공모에 「스무 살의 축제」가 당선되어 생애 첫 책을 가졌다. 장편 소설 「스무 살의 축제」, 「비단길」 이 있으며, 그 외에 발표한 작품으로, ‘제7일의 밤’, ‘어느 고물상의 노트북’, ‘꽃등불’등이 있다. 인간애와 생명의 존엄성에 관해 생각하며, 소설의중심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