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이는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규명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래를 위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역사연구자가 과거의 사건을 선택하여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에는 대화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분노가 그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20세기의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역사연구의 계기를 ‘분노와 함께’(cum ira)라는 말로 표현했다.
역사연구와 서술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분노(ira)는 분명히 불화를 수반하는 증오(odium)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분노하며 그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 한다. 역사는 편할 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므로, 역사가는 불편한 진실도 드러내야 한다. 역사가의 의무에는 역사에서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분노하며, 이를 성찰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찾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분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창조적 힘을 가지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검토하는 데에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된다. 한국교회사는 이미 230년의 역사과정을 걸어왔다. 이는 그만큼 많은 사연과 사건을 안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많은 사연과 사건 가운데 불편한 진실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과감히 드러내려는 노력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분노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분노는 한국교회사를 성찰하고 고백하고, 정개(定改)하여 화해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분노는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새로 여는 힘을 준다.
신부 문규현은 교회사에서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에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통해본 한국천주교회사’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공동체적 경험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면서 현재의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을 묻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주제는 한국천주교회사이고, 부제가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는 말이다. 한국천주교회사라는 제목은 일반적으로 역사학적 방법에 따라 서술된 역사서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세상의 시각’은 저자의 신학과 역사에 대한 태도와 해석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 책의 특성은 ‘세상의 시각’에 있다. 즉, 이 책은 ‘한국천주교회사’라는 부분보다 ‘세상의 시각’이란 측면에 더 중점을 두고 서술되어 있다. 책의 제목으로 병기된 ‘세상의 시각’이란 말에는 교회라는 좁은 틀 안에 안주하는 소수자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저자는 교회의 터전이 되는 민족의 시각에서 교회사를 바라보자고 주장한다. 지상 교회의 태토(胎土)인 세상이나 민족을 떠나서는 교회가 목적으로 하는 세상의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가 불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이에 착목하여 그 시각에서 교회사를 보고자 했다. 그래야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역사학자의 태도라기보다는 역사신학자의 태도다. 역사학은 과거의 시간과 사건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전재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역사신학은 과거의 특수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궁구하는 특성이 있다. 이 부분은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사론(史論)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한국교회사에 관한 역사신학적 저서이며 사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이 책의 특징이 있고, 읽는 맛이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 입각하여 한국교회사를 초장부터 서술한다. 즉 한국교회가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한 이후 직면하게 된 조상제사문제와 박해에 따른 문제점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사론서인 만큼 초기 교회사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상당히 생략되어 있다. 이 책의 저술목적은 해방 이후 현실을 진단하려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박해시대나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반성적 차원에서 서술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국교회의 과거사에서 드러났던 불편한 진실들과 정면으로 맞서서 이를 드러내고 반성하면서 현실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식민지시대 교회의 지도층이 식민지 파쇼체제에 대해서 침묵했고 협조했던 뼈아픈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식민지 아래에서 교회가 강조했던 반공주의가 어떠한 작용을 했는지를 주목했다. 또한 해방 이후 남한사회에서 절대선으로 인정되던 반공주의가 민족분단을 심화시켰고, 독재라는 비인간적 정치현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했다. 그는 해방직후 반공논리가 일부 인사들에게는 자신의 친일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도 이에 편승하여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분단에 안주하려 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을 전후하여 공산권에서 가해지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교회가 제시해왔던 반공의 논리를 강화시켜주었음을 설명하고자 했다. 친일의 반공논리와 교회의 반공논리가 묘한 조합을 이루어 갔다. 이는 반공의 맹목성에 종교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주목했다.
그리고 교회가 주장했던 민주회복이나 인권의 보장이 반공과 승공을 위한 방법처럼 구사되던 상황도 놓치지 않았다. 즉 저자는 반공을 목적으로 보고 민주회복을 방법으로 생각했던 상황을 주목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면서 인간성회복이나 민주주의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임을 설파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그의 독특한 사관이 자신의 자태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말씀의 실천이라는 화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통해서 자기쇄신을 통한 현대화를 실현했다. 공의회는 세상 위의 교회를 세상 안으로 들여보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교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한국교회는 그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한국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
공의회는 교회의 사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했다. 이 요구에 부응했던 대표적 운동체가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그들은 제2차 공의회 이후 자신의 교회를 민족과 민중의 눈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의회는 사회에 대한 사제들의 투신 의지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1970년대 이후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립과 활동은 공의회의 산물임과 동시에 가톨릭의 한국화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된 한국교회사적 사건이었다. 저자도 이에 합류하여 동료사제들과 함께 행동했다. 이러한 정의구현운동은 한국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높여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제 문규현의 이 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물결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역사적 성찰기록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역사신학은 숨겨진 과거의 불편한 사실들을 드러내고 고해하면서 민중과 화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에 대한 포기를 반복음적 행동이며 그리스도인의 자기모순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렇게 천주교 정의구현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목적의 정당성을 선명히 해주고자 했다. 그리고 이 단체의 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감안할 때, 사제 문규현의 역사신학 내지 사론은 공의회정신의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한국의 역사현실에서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는 직접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뛰어들었고, 민족의 화해를 앞당기고자 투신했다. 그의 이 행동은 한국교회사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나 역사신학적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역사는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논리적 구조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과성을 밝히려 한다. 그리하여 사건이 일어나게 된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여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취하고자 한다. 또한 역사는 과거의 ‘불편한 진실’만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과거라는 시간의 전체적 흐름 위에서 인간 전체를 분석하여 서술한다. 그리고 각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호 연관성과 인과관계의 연쇄적 고리를 밝혀서 현재와 미래에 역사적 교훈을 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는 ‘분노와 함께’ 시작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더 큰 성숙을 위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계속적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문규현은 더 큰 성숙을 위한 교회의 성장통을 함께 앓으면서, 분노와 함께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았다. 그 분노는 결코 증오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교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책의 깊은 속내가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간혹 사실에 대한 불충분한 서술이 발견되고, 지나치게 특수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할 가치가 있다. 이는 이 책이 교회와 민족의 사랑, 소망 그리고 믿음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글쓴이 : 문규현 신부
사제 수품 이래 지금까지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 생명평화 세상을 위해 힘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