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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남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화 문제에 대해 유보하지 않고 자신들을 헌신한다고 하면 세계는 어떤 모습이 될까? 젊은이, 중년, 그리고 노인 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크고 명쾌하게 말한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또한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위해 함께 증언하면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러한 양심의 동의가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래도 여전히 수백만 명이 굶주리는 동안에 매달 수천만 달러의 돈을 죽음의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사용할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임박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아직도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할까? 그래도 우리는 출산과 양육 그리고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부모들의 말을 듣게 될 것인가?


좁게는 세월호의 사건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은 목숨들에서 넓게는 지금 끔찍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을 보면서 우리들은 위의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평화’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악마적인 방법으로 퇴색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소중한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감상주의, 이상주의, 과격주의, 낭만주의 심지어는 무책임성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너는 평화를 위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종종 “너는 몽상가야.”라는 말로 들린다. 평화를 위한 일에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투여하라는 호소를 들을 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웃거나 간단하게 생각하곤 한다. 미국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내세우며 강행하고 있는 강정마을의 해군지기의 건설이 새로운 전쟁 방지보다는 토목 사업으로 인해 새로운 일거리가 생겨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말이다.


“내가 평화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전쟁을 위해 말한다.” (시편 120,6-7 참조)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은 싸우려는 우리의 욕망, 그리고 최고의 강대국이 되고자 부끄러움을 모르고 드러내는 욕망의 미소를 매일 흘린다. 평화를 위한 참된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들리지 않으며, 평화를 위한 말을 할 때 그것은 가장 믿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적들이 평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선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자유’라는 말이 ‘자기 과신 self- confidence’ 이라는 말과 함께 발설되는 것처럼, 평화라는 말 역시 소심하게 혹은 종종 충성스럽지 못하거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의 두려움과 함께 언급된다.


그렇다면 평화라는 말이 이러한 방식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작고 큰 전쟁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생존권을 보호해 준다며 말하는 권력자들의 종이 날 같은  미소가 우리의 목숨 줄을 더 깊게 베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의 가치와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보다 강한 무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40번 이상이나 파괴시키기에도 충분한 수만 개의 전략핵무기와 이만 이천 개의 전술핵무기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며 선동하는 연설을 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대륙간 탄도탄이나 B-52 폭격기, 그리고 시민을 치는 탱크, 인간들에게 하소연 할 수 없는 동물들의 생존권과 가난한 어촌 주민들의 생존권을 묵살하면서 진행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군사 기지 건설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또한 우리는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천오백만 명의 사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토론을 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학살을 위한 준비를 빠르게 계속 진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평화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너무도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가능성과 평화의 바람직함에 대한 의견을 가지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고 말하려 노력하고, 또 방어 과학이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앞서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애쓰는 “지배자, 통치자, 명령하는 사람, 부자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묵시 6,15 참조)에게 공감을 표시해 왔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전쟁에 찬성하고 자신들의 지식이 만들어 낸 악마적 생산물(핵을 포함한 무기들)이 반드시 사용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지지한다. 평화를 찬성한다.”라고 소리 지르면, 그 목소리들은 너무나 힘이 없고 단순하고 순진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세련된 주장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소용없는 존재라고 느끼도록 유인한다.
이런 세태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저항하라’ 저자 헨리 나웬은 “예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제 더 이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의 배경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급박하게 개입해 들어와 지금이 바로 모두 함께 “우리는 평화를 지지한다.”라고 말해야 할 그때라는 것을 알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평화’라는 말을 ‘자유’라는 말만큼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용기를 발견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자신들이 평화를 만드는 이들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달리 말하면,  ‘평화’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 전 사회적이며 지구적인 것이고, 악에 대해 저항하며 평화를 만드는 일은 모든 진정한 영성의 중심인 것이다.


    매일의 삶속에 드러나는 불합리와 부조리 그리고 고통과 불의 등 죽음의 문화가 신앙과는 아무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사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이 책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거스르는 자들에 저항하며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즉, 우리는 ‘가난하고 주변화 된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진정한 연대, 전쟁에 대해 공적으로 반대편에 서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평화의 길을 걸으셨고 제자들이 자신처럼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서 우리가 발견한 평화에 대해 표명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두 개의 방법, ‘기도와 저항’에 대해 서술하고 우리가 그 두 가지의 방법을 통해 어떻게 ‘평화’를 바라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룩할 여지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은 ‘평화’에 대한 기본 원리는 물론 그것의 절대적인 중요성 및 그것을 이룩할 실천적인 방법까지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삶

 

1장 기도하라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상처와 요구들
-새로운 언어
-기도 행위
-회개의 심정으로

 

2장 저항하라
-신성한 필요, ‘아니요’라고 말하기
-악마와 직접 싸우지 마라, ‘예’라고 말하기
-어디서 기도할 것인가, ‘저항’으로서의 기도

 

3장 함께하라
-고백과 용서
-희망의 씨앗
-감사

 

행복하라

헨리 나웬

글쓴이 : 헨리 나웬

-1932년 네델란드에서 출생.

- 1957년 사제 수품.

- 노틀담, 예일,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르침

- 198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장 바니에가 창설한 '라르슈 새벽 공동체에 동참.

- 199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캐나다 토론토 '라르슈 새벽고옹체'의 사목을 맡아 보며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함.

- 저서 <열린 손으로>, <고독 속으로>,<마음의 길>,<제네시 일기>,<나의 마음이 님의 마음에다>,<어릿광대> 등 다수.

 

옮긴이 : 김정수

여성평화운동가. 평화윤리를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성,평화,영성에 관해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일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