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이 책에 대하여
2천 년 교회 역사를 곱씹으며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을 찾다!
내로라하는 교회 석학 9인이 한데 모였다.
좀처럼 한 자리에서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모여 초대교회, 중세교회, 근·현대교회,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까지, 2천 년 교회 역사 안에서 그야말로 왁자지껄했지만 속되지 않았던 교회의 여러 사건들과 그 뒷이야기까지 자유롭고 진솔하게 나누었다.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는 총 스물 여섯 가지의 주제로 이루어진 방대했던 이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교회의 전통과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이 다듬어지는 과정들, 그러면서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찾아갔던 과정들을 교회사적으로, 영성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며 앞으로 우리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 책을 읽노라면 특히 요즘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지혜로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샘솟도록 이끈다.
이 책은 우리 신앙의 뿌리를 돌아보며, 신앙인으로서 나아갈 길을 찾고, 성숙한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2 . 본문 속에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 참 안 어울리지만 그 ‘왁자지껄’ 속에서 교회의 어떤 본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펼쳐 드시고 낭독합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 희년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환호를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잡아다가 죽이려고까지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상황만 보더라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세주께서 선포하신 내용조차 인간들은 왁자지껄하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이 왁자지껄한 상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노성기, ‘왁자지껄 교회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에서
무엇보다 예수님의 복음이 기준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순식간에 많이 퍼지다 보니 ‘저쪽에서 믿는 예수님과 이쪽에서 믿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신가? 그렇다면 어떻게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솟아납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기 직권으로 주교들을 소집해 325년에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믿음이 무엇인지 줄거리를 잡게 했습니다. 그 뒤 381년에는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두 번째 공의회가 열려 우리가 주일이나 대축일에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완성합니다.
- 최창무, ‘이단에 관하여’ 중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는 새삼스럽게 자선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미 복음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지고 빈민과 병자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일깨우고 있죠. 거기서 그분이 “사회적 사랑”이라는 말을 했어요. 이 말은 본래 아우구스티노가 한 말입니다. 세계를 지상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로 나눠 놓고 하느님 나라에 소속하는 방법은 ‘사사로운 사랑’이 아닌 ‘사회적 사랑’이라고 했고, 이 용어를 그대로 받아서 교황님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사랑이 뭐냐 하면 바로 정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회교리는 우리의 사사롭고 개인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회적 사랑을 가르치며, ‘사회적 사랑은 정치다.’라는 이 한마디에 교황님 첫 회칙의 핵심도 있습니다.
- 성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사회교리’ 중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이 구약성경과의 연계 안에서, 혹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 안에서 드러내는 차별성의 중심에는 ‘소외’라는 주제가 있다고 봅니다. 기존의 식탁은 초대된 사람들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는 그리스도교의 밥상에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3 . 본문 속에서
는다는 것, 오히려 소외되어 못 먹고 잔칫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들에게 ‘이 잔치는 너희를 위한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단초가 되는 원체험이 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하느님도 우리의 밥상에서 소외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죠. 미사가 잔치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정착된 것 같은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만의 잔치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초대된 잔치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 김혜윤, ‘우리의 밥이 되신 하느님’ 중에서
앞서 대주교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은 ‘밥이 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밥이 되는 것’인데 이 기본 원칙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같아요.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에서부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딱 세 글자로 요약한다면 ‘위하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인을 위하여, 사람들을 위하여, 이를 위해 아버지 품에서의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구유로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할까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 타인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보통 회식 자리에서 ‘위하여’를 외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때 그 ‘위하여’가 내 이웃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지향을 담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사는 길이 조금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국춘심, ‘세상의 밥이 되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참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경청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것도 선포된 복음을 들음으로써입니다. 들은 바를 믿고 실천해 나가는 삶을 살아가는데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세상의 밥이 되기 위해서는 밥이 되신 그분의 가르침이나 그 뜻을 먼저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참된 밥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올바른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렉시오 디비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히 들음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우리가 읽고, 읽은 말씀을 계속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대적인 의미로 묵상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이제 들음입니다. 그리고 들은 것에 대해서 응답을 하는데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허성석, ‘우리의 밥인 성경’ 중에서
현대 사회의 특성 중 하나가 어떤 현상에 열광하고 집중하는 것인데, 우리가 말씀 안에서 힘을 얻고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고자 한다면 현상만을 쫓아다니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하느
님 안에서 진중하게 자기 자신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런 현상중심적인 신자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요구했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일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으로 돌아오십시오.”
- 옥현진, ‘우후죽순 짝퉁밥’ 중에서
세계화 시대, 정보화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요즈음은 수많은 정보와 사상, 문화들이 지역적 경계를 허물고, 오고 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교 차원에서도 불량식품과 같은 그릇된 신앙 운동이나 흐름들이 들어오고 있고, 그에 따라 신앙적으로도 비빔밥 구조의 혼합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것이 영양가가 있는지는 관심이 없이, 그저 혓바닥에 맛있게 느껴지는 것만 먹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흐름에 제대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적 상황이나 흐름에 대응한다고 하여, 교회가 지니고 있는 본질이나 복음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이나 정체성은 항상 변함없이 굳건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과 해를 가져오는 음식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교회의 임무입니다.
- 노길명, ‘우리 시대에 필요한 밥상’ 중에서
바로 그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과 계급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1862년에 나온 『신명초행』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뇨.” 하고 묻습니다.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가 관직이 높기 때문인가, 재산이 많기 때문인가, 아니면 지식이 많기 때문인가, 신분이 높기 때문인가, 얼굴이 아리땁기 때문에 사랑하는가’를 놓고, ‘아니다, 아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위位가 있기 때문에.’라고 답합니다. 오늘날 식으로 하면 인격이겠죠. 못났거나 지식이 얕거나 아니면 관직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신분이 낮아도, 사람으로서 태어난 이상은 사랑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유근명은 1790년대에 세례를 받았던 내포 지방의 신자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다음에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당시 노비 한 명의 값이 소나 말 두 마리의 값이었습니다. 대단히 비싼 것이지요. 제일 큰 도둑이 소도둑이었던 시대였는데, 이런 소나 말 두 마리 값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켜 줬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거든요. 그 당시 교회 책 어디에도 노비를 해방시키라고 안 했지만,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내린 논리적 결론이었습니다.
- 조광, ‘조선에 오신 하느님’ 중에서
저자 : 최창무 외 8인
최창무 대주교, 옥현진 주교, 국춘심 수녀, 김혜윤 수녀, 노길명 교수, 노성기 신부, 성염 교수, 조광 교수, 허성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