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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가 아닌 그녀 자신이 되기 위해

하느님께 귀의한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 - 여성으로서의 서로의 존재를 찾게끔 도와주는 고부간의 이야기"

룻기는 여성됨의 영성에 관한 일종의 논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신과 나는 지금도 영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희망 어린 마음과 메마른 영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그 삶은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가?


<내 가슴에 문을 열다>,<십계명 마음의 법>,<재 속의 불씨> 등을 통해서 하느님과 참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펴 온 조안 키티스터 수녀가 이번에는 '남녀가 함께 사는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라는 세상의 굴레를 벗고 '인간다움'을 되찾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수녀'이자 '멋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오랫동안

이렇게 말해 왔다는 글쓴이는,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된다. 법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임금과 권리, 대표성, 보호를 누려야하며,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은총의 통로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그녀 스스로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남성의 자유와 능력을 지향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성경의 '룻기'를 떠올린다.


이방인의 땅에서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나오미.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오미를 따라 이방인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며느리 룻.

남자에게 속해 있어야만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두 여인은 '남자 없이'스스로 인생을 일구어 나간다.

수 천 년도 더 된 이야기인 '룻기'에서 지은이가 발견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은 분명 남녀를 모두 소중히 여기신다. 이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한쪽 성은 온전히 인정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쪽 성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성차별주의'라고 불리는 이러한 사회의 피해자는 남녀 모두이다.

'강인한 남자'로 대표되는 남성다움에 갇혀 살아야 하는 남자는 물론,

 '숙녀'로 대표되는 여성다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자 또한 행복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아닌 '인간다움'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 이런 분들에게 권합니다
-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 사회의 모든 남녀에게 권합니다.



Review <룻 이야기>

병원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게 된 적이 있었다.

16살 때 시집을 가서 남편의 구타와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고되었던 시집살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몸과 마음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계속 듣고 있기엔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옆에 앉은 남자가 울고 있었다. 아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의 이야기에 눈물지었을까?

아마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부터였을까? 여성의 삶에 연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가전제품이었다. 가사노동만이 유일한 목적이자 기능이며 성능이 떨어지면 화난 주인에게 발로 차여도 되는 존재,

사회나 가족구성원의 한 주체가 아니라 도구 내지는 보조자 일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것이 여성이 갖추어야 할 미덕인 것처럼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고, 여성들조차도 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습과 체제에 순종하며 눈물 흘리고 있으면 이를 궁휼히 여긴 마법사가 왕자님께 모셔다 주고 결혼에 성공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이야기가 끝내 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여성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게 된 것 같다.

남자 잘 만나는 것이 여자 인생의 종착점인가? 여성의 행복은 남자에게 달려있는가?

 

이에 룻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독립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남성으로 부터 독립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되찾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큰 비전을 향하는 것은 항상 변화가 따르고 변화는 상실을 수반하며 상실은 항상 고통스럽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모압 땅에 안주하며 살 것인가? 베들레헴 한 가운데로 뛰어들 것인가?

 

이제야 우리나라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과도기일까?

오랜 시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들은 절규가 되어 독립선언보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워 보이며,

여성부와 남성연대는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언제부터 남성과 여성이 적이 되었는가? 보아즈는 룻의 든든한 조력자가 아니었나?

룻은 보아즈에게 겸손하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보아즈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정당한 구조요청이었다.

그리고 룻은 온 힘을 다해 룻을 지키고 도왔다. 룻과 보아즈는 함께 했기에 다윗 왕조가 시작되었고,

그 계보는 그리스도까지 이어져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남자의 성과로만 기억되어왔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류를 절름발이로 창조하신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을 위해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을 적극 참여시키셨다.

이제라도 하느님께서 여성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이라는 이름에 한계를 짓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스스로 제약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남자다. 여성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던 사회 안에서 자라왔고 그렇게 배운 남자다.

하지만 여성을 사랑한다. 나의 어머니도, 동생도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가 겪었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동생이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란다.

이젠 내가 사랑하는 여성들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를 더 이상 묻어 두지 않고,

룻이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 뛰어들어 자신의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줍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성이라는 말이 더 이상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기를 바라며...






감사의 글


들어가면서


1장 상실 Loss
2장 변화 Change
3장 전환 Transformation
4장 연륜 Aging
5장 독립 Independence
6장 존중 Respect
7장 인정 Recognition
8장 통찰 Insight
9장 역량 강화 Empowerment
10장 자기 규정 Self-Definition
11장 드러나지 않음 Invisibility
12장 성취 Fulfillment




조안 키티스터 : 글쓴이
  조안키티스터 Joan Chittister,OSB 수녀는 '미래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현대 영성을 탐구하고 발굴하는

  베넷비전Benetvision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김정수 : 옮긴이
 여성평화운동가. 평화윤리를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성,평화,영성에 관해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일도 하고 있다.

 역서로 <헨리 나웬의 평화의 영성>(성바오로,2009)이 있다.